프랑스의 수호성인이며 가톨릭이 깊게 뿌리내리지 않았던 프랑스 땅에서 이교도를 물리치고 복음화를 꽃피웠던 성인 마르티노의 유해는 프랑스 투르의 성 마르티노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투르는 ‘가톨릭교회의 맏딸’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5세기부터 순례객이 몰려든 프랑스 최초의 순례지입니다. 이 신성한 장소는 길고 매혹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매년 수천 명의 방문객이 마르티노 성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오늘날 성 마르티노 대성당은 역사적인 랜드마크일 뿐만 아니라 성 마르티노의 삶과 가르침이 지속적으로 미친 영향에 대한 살아있는 증언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성 마르티노의 생애
1. 가족 배경과 기독교에 대한 초기 관심
투르의 마르티노는 서기 316년경 로마의 판노니아 지방(현재 헝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군사 호민관으로 복무하는 로마 군대의 고위 장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의 전쟁의 신인 마르스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이름을 마르티노라고 지었는데, 그의 아들이 군사 지도자로서 그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바랐습니다. 성 마르티노는 아버지가 이탈리아의 파비아로 전속되자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는 합법화되었지만,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시기이자 이교도는 여전히 만연한 시대였습니다.
성 마르티노의 제자 술피키우스 세베루스(Sulpicius Severus)가 기록한 『성 마르티노의 생애』에서 마르티노의 신앙이 어린 시절 비밀리에 발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용기, 희생, 확고한 믿음의 모범이 된 기독교 순교자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어릴 때부터 기독교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자선, 연민, 겸손이라는 기독교 가치를 배웠으며, 이는 그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티노는 가족, 특히 기독교에 반대하는 아버지의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로마 군대는 엄격한 이교도 세계관을 옹호했고, 마르티노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기독교의 평화롭고 자비로운 이상보다는 로마의 군사적 이상을 구현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티노는 자신의 그리스도인 성향을 가족과 로마 군부대에 숨겨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믿음을 갖고 세례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마르티노는 열 살이 되었을 때까지 정식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을 따르려는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신앙에 헌신했고, 자신이 접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묵상하면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마르티노는 여전히 그의 가족과 그들의 기대를 존중했으며, 기독교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과 로마 장교의 아들로서의 의무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3. 병역 소집과 성 마르티노의 망토
15세의 어린 나이에 그는 자기 뜻과는 달리 군인이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로마군에 입대했지만 이미 마음은 그리스도를 따랐고, 그곳에서 예비신자가 되었습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퇴역 군인의 아들은 군 복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마르티노의 입대는 명예이자 의무로 여겨졌습니다. 군생활의 제약 속에서도 마르티노는 기독교 가르침에 대한 헌신을 유지했으며 동료 군인들 사이에서 친절과 관대함으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그는 종종 불우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배급량을 나누어 주었고, 지위나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존중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성 마르티노가 속한 부대가 프랑스의 아미앵 근처에서 주둔하던 335년 유난히 추운 겨울, 마르티노는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면서 성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한 걸인을 만났습니다. 마땅히 줄 것이 없었던 마르티노는 칼을 꺼내 입고 입던 망토를 반으로 자르고 떨고 있는 남자에게 절반을 주었습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그가 거지에게 준 옷의 절반을 입고 그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습니다.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아직 예비 신자인 마르티노가 나에게 이 이 망토로 나를 덮어 주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걸인은 실은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이 심오한 신비체험 후 마르티노는 18세에 세례를 받았으며 신앙을 더욱 굳건히 했고, 그리스도와 사랑의 삶에 대한 더 깊은 헌신을 추구하였습니다.
성 마르티노의 일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 으뜸은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지하 성당의 성 마르티노 경당에 그려진 시모네 마르티니의 벽화 시리즈입니다. 그곳에는 마치 그림으로 읽는 성인전처럼 성인의 생애를 벽면 가득히 아름다운 벽화로 그려 놓았습니다. 그가 걸인에게 나눠준 반쪽 외투 또한 ‘성 마르티노의 기적의 망토’ (Cappa Sancti Martini)로 불리며 중세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 중 하나가 되었으며, 순교자가 아니면서도 성인이 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수도원 설립
예수님 환시 체험 이후 마르티노의 신앙은 더욱 깊어졌으며, 스무 살 즈음의 그는 자신의 신앙을 따르겠다고 결심하여 상관에게 다가가, 지금까지는 군인으로서 황제를 섬겼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섬기려고 한다며 제대를 요청하며, “나는 그리스도의 군인입니다. 내가 싸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비겁하다는 비난을 받고 잠시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어 자신의 영적 소명을 온전히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먼저 어머니를 개종시키고 또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인도했으나 아버지만은 끝내 개종시키지 못했습니다.
군대를 떠난 후 마르티노는 기독교 교사들을 찾았고 결국 프랑스 푸아티에의 주교인 성 힐러리의 도움을 받아 은수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은수자들이 그곳으로 몰려와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면서 갑자기 큰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었고, 마르티노는 결국 푸아티에 근처의 리구제(Ligugé)에 작은 수도원 공동체를 세웠는데, 이는 갈리아 최초의 수도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는 기도와 금식, 봉사의 삶을 살았으며 금욕적인 생활방식에 대한 헌신을 통해 서유럽 수도원주의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성 마르티노의 생애』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 그의 구마(마귀를 쫓아내는)와 기적적인 치유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으며, 병자를 고치고, 악마를 쫓아내고, 심지어 기도와 신앙을 통해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리구제에서의 마르티노의 활동은 갈리아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의 시작을 알리고 서유럽 전역에 수도원 제도를 확산시키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주교로서의 성 마르티노의 사역
그 후 투르의 주교가 선종하자 주민들은 마르티노에게 주교가 되어 주기를 간청하였지만, 그는 수도사의 조용한 삶을 선호했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끈질기게 권하였고 마르티노는 결국 서기 371년 7월 4일 그 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주교로서 그는 계속해서 단순하게 살았으며 투르 외각에서 80명의 제자들과 함께 작은 골방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주교직을 수행했습니다. 교구의 각 본당을 걸어서 방문하고 전교에 힘을 쏟자 프랑스 곳곳에서 이교도 신전이 파괴되고 사람들의 개종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갈리아 전역을 자주 여행하면서 기독교 메시지를 전파하고,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시골 지역에 여전히 만연했던 이교도 관습에 맞서 싸웠습니다.
술피키우스 세베루스(Sulpicius Severus)는『성 마르티노의 생애』에서, 인내, 겸손, 연민을 특징으로 하는 마르티노의 복음화 방법을 강조합니다. 그는 처벌보다는 설득을 선호했으며 진정한 회심은 기꺼이 하는 마음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마르티노의 접근 방식에는 종종 평화로운 대화와 필요한 경우 기적적인 행동이 포함되는데, 마르티노가 이교도 신전에 맞서 신성한 나무가 쓰러질 때까지 기도하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을 확신시킨 일화를 이야기합니다. 또한 마르티노가 곁에서 기도한 후 다시 살아난 한 청년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에도 불구하고 성 마르티노는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모든 성공을 자신의 능력보다는 하느님께 돌렸습니다.
성 마르티노의 마지막 여정
1. 성 마르티노의 죽음
『성 마르티노의 생애』에 따르면, 성 마르티노는 칸데스(Candes) 지역 성직자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면서도 마르티노는 교구 성직자들 간에 발생한 불화를 해결하고자 칸데스 사목 방문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성직자들 간의 화목을 이루고 수도원으로 돌아가려던 중 병에 걸려 위중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애통 해 하는 이들을 향해 “주님, 아직 당신 백성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거절치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며 하늘을 향해 손을 드높인 채 기도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성직자들이 몸을 돌려 편히 하시라고 청하였으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냥 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에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2. 성 마르티노의 임종과 환시
건강이 악화되면서 마르티노는 심오한 영적 환시를 체험했습니다. 세베루스의 기록에 따르면, 마르티노는 사탄이 그의 침대 근처에 서서 그의 마지막 순간에 그를 유혹하고 괴롭히면서 그의 영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과 결의로 마르티노는 사탄을 꾸짖으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피에 얼룩진 짐승아,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너는 나에게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품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이러한 악에 대한 저항은 마르티노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 죽음에 맞서는 용기, 그리고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헌신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시력이 흐려지자 마르티노는 기도 속에 깊은 영적 묵상과 평화의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그의 얼굴이 마치 하느님과 교감하고 있는 것처럼 고요하고 신성한 빛을 발산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은 마르티노가 다가올 천상의 삶에 대한 확신과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마르티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생으로 가는 통로였으며, 그는 평생 동안 보여준 겸손과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죽음으로 다가갔습니다. 성 마르티노는 서기 397년 11월 8일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 드리며,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3. 임종 이후의 애도와 기적
성 마르티노의 임종 후 그의 제자들은 동정심 많은 친구이자 영적 지도자를 잃었다는 사실에 비탄에 잠겼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투르 전역과 그 외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 갈리아 전역의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졌는데, 그들은 뛰어난 신앙과 성실함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현했던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성 마르티노가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은 그의 시신을 장사 지낼 준비를 했습니다. 세베루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그의 시신이 성자의 영적인 현존이 깃들어 있는 신성한 유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의 유해를 보존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성 마르티노는 칸데스에 묻히는 것을 선호했지만, 투르 사람들은 그를 영적인 아버지로 여겼기 때문에 그의 시신을 그의 교구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했습니다. 협상 끝에 마르티노의 유해는 루아르 강을 따라 보트를 타고 투르로 다시 이송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강둑에 줄을 서서 경의를 표하고 꽃을 강에 던지며 경의를 표했습니다. 경외심과 슬픔으로 가득 찬 이 행렬은 최초의 기독교 순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후 수 세기 동안 많은 순례자들이 택하게 될 길을 확립했습니다. 투르에 도착하자마자 성 마르티노는 서기 397년 11월 11일에 묻혔는데, 이 날짜는 나중에 그의 축일이 되었습니다. 그의 무덤은 작은 예배당에 안치되었으며, 결국 중세 유럽의 가장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인 성 마르티노 대성당으로 성장했습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 대성당
투르의 성 마르티노 대성당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재건축과 복원을 거쳤습니다. 원래 성당은 서기 397년 성 마르티노가 죽은 직후인 5세기경에 지어졌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작은 예배당이 세워졌으나, 성 마르티노에 대한 헌신이 커짐에 따라 이곳은 곧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9세기에는 성 마르티노의 영향력을 인정한 카롤링거 왕조 통치자들의 지원을 받아 훨씬 더 큰 대성당이 건설되었습니다. 이 대성당은 로마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위대한 유적지와 비교할 수 있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순례 교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대성당은 10세기 노르만인의 침략으로 인해 파괴되었고, 이후 16세기 프랑스 종교 전쟁 중에 손상되었습니다. 많은 교회가 모독과 파괴에 직면했을 때 프랑스혁명 중에 결국 철거되었습니다. 다행히 성 마르티노의 유해가 담긴 지하실의 일부가 보존되었습니다.
19세기에 성 마르티노의 유산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현재의 성 마르티노 대성당의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1924년에 완공된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비잔틴 양식으로 디자인되었으며, 성인의 삶과 기적을 기리는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와 복잡한 모자이크가 특징입니다. 오늘날 이 대성당은 성 마르티노의 유해에 대한 경이로운 건축적 경의를 표하는 건축물로 자리 잡고 있으며 프랑스의 역사적인 기념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지하실에는 성 마르티노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 무덤은 모자이크로 장식된 보스게스의 대리석과 분홍색 사암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십자가로 장식된 석관 모양의 윗부분은 청동 기둥이 있는 10개의 기둥으로 지탱되어 있으며, 성 마르티노의 초기 무덤의 돌을 덮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