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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해외 성지순례 : 프랑스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대성당

by 루시아1004 2024.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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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의 무덤이 있는 성 루도비코 대성당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의 무덤이 있는 성 루도비코 대성당

 

프랑스 생 로랑 쉬르에 있는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대성당(생 루이스 마리 그리뇽 드 몽포르 대성당이라고도 함)은 루도비코 성인에게 봉헌되었으며, 성인이 묻혀있는 곳입니다. 대성당의 건축물은 역사적, 종교적 중요성을 반영합니다. 몽포르의 삶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헌신의 장면을 묘사한 복잡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조각상, 제단 등 고딕 양식과 신고딕 양식이 혼합된 것이 특징입니다. 순례자들은 루도비코 성인의 풍부한 영적 유산에 깊이 참여하고 복되신 어머니의 사랑의 전구를 통해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초대받습니다.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의 생애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성인은 1673년 1월 31일에 프랑스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몽포르 쉬르 므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 요한 그리뇽은 왕실 변호사로 공작신분이었으며, 집정관의 딸 사이의 1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첫째가 사망함으로써 루도비꼬 성인이 장남이 되었는데, 그의 17명의 형제들 중에서 세 명은 사제, 네 명은 수녀가 되었습니다. 그는 5세부터 어머니에게 묵주기도를 배워 기도하였으며 동생들이 기도문을 읽게 되자 동생들에게도 묵주기도를 가르쳐 줄 정도로, 어릴 때부터 성모님을 극진히 사랑했기에, 견진성사 때 마리아를 붙여 루도비꼬 마리아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성모님의 성화나 성상만 봐도 기뻐 어쩔 줄을 몰랐으며, 성모님 성상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한두 시간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12세에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성 토마스 아베케 대학 부속 중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20세까지 8년간 수석으로 공부하여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머리가 좋았으며, 시, 그림, 조각 등 예술 방면에 특출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루도비꼬는 부친의 지인으로부터 파리의 성쉴피스 신학교에 입학한다면 후원을 해 주겠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부친은 루도비꼬의 신학교 입학을 크게 환영하여, 루도비꼬는 1693년 20세에 파리로 향하게 되는데 가는 도중에 첫 번째로 만난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 주었으며, 두 번째 사람에게는 가진 돈을 모두 주어 200마일의 먼 거리를 열흘에 걸쳐 맨발로 걸어서 신학교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는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처지여서, 그의 후원자는 더 이상 루도비코를 도와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활비와 학비를 직접 벌어야만 했기에 일을 하면서 공부를 지속하게 됩니다.

이단과의 싸움

루도비코 성인은 1700년 6월 5일 사제서품을 받은 후 16년 동안 걸어서 프랑스 전 지역을 다니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와 성모 신심을 전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이웃 유럽국가들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민들이 무척 힘들었던 시기였고, 특히 영국과는 백 년간의 긴 전쟁으로 서로 간에 감정이 좋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는 절대왕정 시대로 왕 다음으로, 성직자가 제1계급이었고, 귀족이 제2계급,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종이 제3계급이며 다음은 평민들이었습니다. 1%의 성직자와 귀족 등은 전국토의 4/5에 속하는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평민들은 농지를 경작하여 지주들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 힘든 시기였습니다. 1775년 미국과 영국의 전쟁이 일어났는데,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적 위기 속에서도 미국이 승리하기를 바라며 미국을 지원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바닥난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국민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걷어 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프랑스에는 얀세니즘(엄격주의)이라는 이단이 생기게 됩니다. 


얀세니즘의 특징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대신에 정의와 심판을 앞세우는  엄격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는 몇 사람만을 위해 죽었고, 구원은 선택받은 사람들 만을 위한 것이며, 동정 마리아 신심은 우상숭배와 비슷하다고 주장한 얀세니우스 주교에 의해 나타났습니다. 루도비코 성인은 얀세니즘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본성을 가지셔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고, 성모 마리아의 모성애와 자비롭고 중보적인 역할 등 마리아 신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고해성사와 성찬례를 통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얀센주의에 맞서 가톨릭 신앙을 갱신하고 정화하려고 필수적이었습니다. 그의 노력은 수많은 신자들과 사제들을 회개시켰으나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선교 활동과 그의 격렬한 근본적인 개혁에 대한 요구는 종종 지방 당국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성모 마리아에 대한 완전한 봉헌에 대한 요구는 때때로 적대감에 부딪혔습니다. 특히, 그의 직접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접근 방식은 지역 당국 및 다른 사람들과 자주 충돌했습니다. 성 루도비코 성인은 당시 교황인 클레멘스 11세로부터 교황 파견 선교사라는 자격을 얻어 교구를 막론하고 전교할 수 있는 특권으로 많은 곳에서 반대를 받으면서도 강론을 지속하였습니다. 그의 얀세니즘 이단에 대한 투쟁은 마침내 얀세니즘이 1713년 로마로부터 공식적으로 파문당하는 결과를 안겨주었습니다.

루도비코 성인의 신학적인 공헌 및 저서

1)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그의 많은 저서 중에서 '성모님 게 대한 참된 신심'은 그의 대작으로 단연 돋보이는 작품으로, 그는 마리아의 영성에 깊은 영향을 준 개념인 마리아를 통한 예수께 대한 완전한 봉헌을 옹호합니다. 이 책은 성인이 죽기 4년 전 1712년에 쓰였는데 성인이 평소에 선교하면서 가르쳤던 것을 정리한 것으로, 참된 마리아 신심가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저술한 것입니다.

 

그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고 하면서 마리아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 있으며, 마리아에게서 멀어진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께로부터도 멀어져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마리아가 모성애와 지혜로 신자들을 당신 아드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에 마리아에 대한 참된 신심은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관계로 이어지고,  우리의 모든 선행을 마리아의 손을 통해서 하느님께 바친다면 마리아는 그것을 정화시켜 주시고 아름답게 꾸미셔서 당신 아드님의 마음에 들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은 수많은 교황들의 승인을 받았으며 마리아 신학의 초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책을 이빨로 물어뜯기 위해서 으르렁거리면서 분노에 미쳐 날뛰는 악마들은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어두운 구석이나 궤짝 깊은 곳에 처박아 두게 할 것이며, 더욱이 이 책을 읽어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박해할 것이다(114항)."라는 성인의 예언대로 이 책은 출판되지 못한 채 1790년 프랑스혁명 당시 묻혀있다가 성인이 죽은 후 126년이 지난 1842년 4월 21일에 우연히 고서들이 든 궤짝 안에서 발견되어 널리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2) 묵주기도의 비밀

루도비코 성인은 생전에 "십자가와 묵주기도의 사도"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십자가와 묵주기도에 대한 신심이 뛰어났으며, 특히 묵주기도는 성인 자신의 성화뿐 아니라 선교사로서의 사도직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도구이며 무기였습니다. 그의 저서 "묵주기도의 비밀"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생애와 죽음과 영광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으로, 성인은 묵주기도를 죄에 대항하는 강력한 영적 무기, 덕행을 달성하는 수단, 그리스도와 마리아와의 더 깊은 일치를 이루는 길로 묘사합니다. 그는 "내가 죄인들의 목에 묵주를 걸 수 있도록 해 주시오. 그러면 그 죄인은 내게서 도망치지 못할 것이오"라고 자주 말하곤 하였습니다. 또한 묵주기도가 단순한 소리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신자들이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에 관한 주요 사건들을 묵상하도록 이끄는 묵상 기도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신비를 묵상하며 바치는 묵주기도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묵주기도는 점차적으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주고, 우리 영혼을 죄에서 깨끗하게 하며, 모든 원수를 물리치고 덕행을 실천하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복되신 주님의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며, 은총과 공로로 우리를 풍요롭게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루도비코 성인의 선종과 레지오 마리애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는 1716년 4월 28일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느끼고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받았습니다. 성인은 극단적인 금욕주의 실천과 마리아를 통한 예수께 대한 완전한 봉헌을 강조한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는데, 임종을 맞이할 때 그는 극적이면서도 깊은 상징적인 행동을 취했습니다. 자신의 목과 팔다리를 쇠사슬로 묶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형을 모방한 형태로 예수님께서 수난 중에 십자가를 지시고 묶이셨던 것처럼, 루도비코 성인은 그 고통에 참여하려는 것입니다. 평소 그가 자신의 선교 활동과 저서에서 자주 설교했던 예수님의 속죄적 고난에 참여하는 방식이고, 자신이 하느님께 완전히 의존하고 기꺼이 그리스도와 결합하려는 의지이며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표현을 반영합니다. 또한 자신을 사슬로 묶음으로써 그는 자신의 영적 빈곤과 세상의 모든 애착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열망을 육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루도비코 성인은 43세를 일기로 선종하였으며 수년에 걸쳐 그의 무덤은 수많은 방문객과 신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작은 마을인 생 로랑 쉬르 세브르에 그의 이름을 딴 성 루도비코 대성당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성인은 생전에 "장차 다가오는 시대에 세속과 악마와 부패된 본성과 맞서 싸울 막강한 군단 레지오, 즉 용감무쌍한 남녀 군사들로 이루어진 예수 마리아 군단이 나타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독자는 알아들으라.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210년 만에 출현한 "레지오 마리애" 는 전 세계에 확산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교황 비오 9세는 1853년에 그의 모든 저서를 공인하였으며, 레오 13세는 1888년에 그를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한편 루도비코 성인을 수호자 중의 하나로 모신 "레지오 마리애" 가 전 세계에 확산되면서 교황청에서도 이를 중시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는 1947년 7월 20일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서 성인품에 오르셨으며, 그의 축일은 성인께서 운명한 4월 28일입니다.

1948년 12월 8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한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성인의 성상 제막식에서 추기경 테레스 키니가 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성 루도비코 마리아는 루르드에서 파티마에 이르기까지 또한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 절정에서 레지오 마리애 탄생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성모발현을 사실상 예언해 주신 분이시다. 그는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예언자가 되어 왔으며, 하느님의 동정 성모님이 때가 차서 당신의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가져다 줄 전 인류가 목말라하는 구원에 대한 선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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