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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해외 성지순례 : 이탈리아 수비아코 성 베네딕토의 거룩한 동굴

by 루시아1004 2024.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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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아코 성 베네딕토의 거룩한 동굴
수비아코 성 베네딕토 수도원

 
이탈리아 수비아코(Subiaco)에 위치한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로 알려진 성 베네딕토 수도원의 거룩한 동굴은 수많은 순례자와 예술 애호가들이 모여드는 존경받는 장소입니다. 아니에네 계곡(Aniene Valley)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옆에 자리 잡은 동굴은 성 베네딕토의 삶과 기적을 이야기하는 장엄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동굴은 성 베네딕토 수도원의 심장부입니다. 이 성스러운 장소는 성 베네딕토가 3년 동안 은수자로 살면서 기도와 관상에 전념했던 곳입니다. 성 베네딕도 수도원과 거룩한 동굴은 기독교 수도원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의 회칙에 명시된 기도, 노동, 공동생활의 균형 잡힌 삶에 대한 강조는 전 세계 수많은 수도원 공동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겸손, 순종을 포함한 베네딕토회 영성의 원칙은 영적 여정에서 수사들과 수녀들의 지속적인 인도와 영감을 줍니다.

성 베네딕토의 생애

성 베네딕토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혼란한 시기인 480 이탈리아 누르시아의 어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성에 대한 깊은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심오한 변화의 촉매제가 된 것은 로마에서 공부한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도덕적 부패와 정치적 불안정이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젊은 베네딕토는 친구들과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패와 쾌락주의를 목격하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도덕적 해이의 환경에 그는 크게 환멸하였고, 더욱 순수하고 헌신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보다 진실되고 거룩한 삶을 추구했던 베네딕토는 도시의 혼란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학문을 포기하고 귀족의 신분까지 버린 채 기도와 묵상, 영적 훈련에 전념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수비아꼬(Subiaco)라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동굴에서 3년간 고독한 수도자의 삶을 시작합니다그의 동굴 생활은 참혹했으나 고독과 묵상의 시간들은 기도, 노동,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는 그의 영적 철학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성 베네딕토와 로마누스 수사의 만남

베네딕토는 수비아코(Subiaco)의 동굴에 정착하면서 절벽 위 수도원에 사는 로마누스(Romanus)라는 수사를 만났습니다. 베네딕토의 성실성과 영적 잠재력을 인식한 로마누스는 젊은 은둔자를 지원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로마누스의 도움은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니라 형제애와 영적 연대의 심오한 몸짓이었습니다. 동굴에 산다는 것은 베네딕토가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로마누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베네딕토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로마누스는 3년 동안 베네딕토를 찾아가 그에게 음식물을 제공했는데, 동굴에 다다르는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줄에다 빵을 매달아서 동굴로 내려 보냈고, 종을 쳐서 빵이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친절한 행동 덕분에 베네딕토는 영적 목표를 추구하면서 육체적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밧줄과 빵의 이미지는 베네딕토의 초기 수도원 생활을 특징짓는 섭리와 지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후에 베네딕토  성인은 수비아코에 12개의 수도 공동체를 세우고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몬테카시노 산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성인이 세운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은 서방 수도원의 발생지가 되었고오늘의 이르기까지 베네딕토회  본부가 되었습니다

부활 대축일과 예수님의 발현

예수 부활 대축일 날, 성 베네딕토는 질병으로 인해 전례 거행에 참석할 수 없어 기도하며 깊은 묵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수도원에서 부활절 축일 미사가 거행될 때 한 신부가 제단에 서서 성찬례 예식을 하는 순간 놀라운 환시를 보게 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나는 빛을 받으며 사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제에게 “너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지만 동굴에 있는 나의 종은 배를 곯고 있다."라며 축성된 성체의 일부, 즉 그리스도의 몸을 베네딕토에게 갔다 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제는 축성된 성체의 일부를 조심스럽게 가져다가 성 베네딕토에게 전달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사제는 즉시 동굴을 찾아 나섰고, 어렵사리 베네딕토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베네딕토에게 가서 “어서 일어나서 성체를 드십시오. 오늘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저를 보내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과 격리되어 있던 베네딕토는 사실 그날이 예수 부활 대축일인지도 몰랐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개입에 깊은 감동을 받은 베네딕토는 깊은 경외심과 감사의 마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셨습니다. 성 베네딕토는 신성한 현존과 사랑으로 깊은 영적 황홀경을 경험했습니다. 이 만남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그의 믿음과 그의 영적 여정과 기도와 관상의 삶에 대한 헌신을 더욱 강하게 하였습니다.

프레스코화에서 읽는 성 베네딕토의  기적

1) 농부의 잃어버린 낫과 수도회 규칙

어느 농부가 숲에서 일을 하다가 낫을 물에 빠트리고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성인이 낫 자루를 물에 넣자 낫이 떠오르더니 다시 끼워졌습니다. 성인은 낫을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을 하라 그리고 슬퍼하지 말라". 이 문장은 베네딕토 수사들의 모든 일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 베네딕토는 모든 수도자들이 스스로 일을 하며 자급자족하도록 하였으며, 이렇게 한 근본적 이유는 바로 노동은 수도자들에게 내적인 자유를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수도자들은 노동은 수도생활에 장애물로 여겨 후원자에 의지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수도자들이 후원자에 의지한다면 삶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간파하였습니다. 그것은 독자적인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운명이 주어진다고 여겼습니다. 노동은 수도자들의 일과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성인은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 노동은 공동 기도"라고" 설파하였습니다. 또 성인은 수도회 규칙에서 "명성을 얻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실제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명성과 이기심만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축복이 아니고 단지 목적을 향한 수단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2) 성 베네딕토의 독살 위기

수비아코에서  20km 떨어진 비코바로에 있던 수도원의 수사들이 명성이  베네딕토를 찾아와 그곳 수도원장이 선종하였으므로 수도원장직을 맡아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비코바로 수도원의 삶과 규율이 문란하고 퇴폐에 찌들었으며, 수사들은 제대로 단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지만, 그들의 끊임없는 간청에 결국 수락하고 말았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부임하여 수도원의 개혁을 위해 엄격한 규율을 요구하자 비코바로 수사들은 그를 초빙한 것을 후회하고 급기야는 그에게 불만을 품고 반발한 자들이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그들은 점심식사 때 식탁 위에 있는 포도주잔에 몰래 독극물을 탔습니다. 성 베네딕토는 평상시와 같이 축복기도를 하기 위해 성호를 긋자 순간 잔이 산산이 깨져 버렸습니다. 음모사실을 알게 된 베네딕토는 탄식하면서 수도원을 떠나 다시 수비아코 동굴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수비아코 부근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열두 곳의 작은 수도원을 세워 그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성 베네딕토는 또다시 인근에 있는 성당 사제 플로렌시오의 질투를 받았는데, 그는 베네딕토를 독살하려고 빵에다 독약을 타고 베네딕토에게 갔다 주었습니다. 성인은 빵을 먹기 전에 성호를 긋고 빵을 잡으려는 순간 까마귀  마리가 날아와 그것을 재빨리 물고 달아났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일이 빈번하자 베네딕토는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으며 베네딕토가 떠나는 날 아침에 플로렌시오 사제는 자기 집의 발코니가 무너져 깔려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까마귀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중요한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3) 장미 가시와 두 성인

성인은 동굴에서 기도생활을 하면서 많은 악마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악마가 베네딕토의 은수 생활을 중단시키기 위해 그의 머릿속에 과거에 그와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을 떠오르게 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너무도 아름다워 베네딕토를 육욕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는데 은수생활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가 남자로서의 욕정을 물리치기 위해 수도복 벗고 장미밭에 온몸을 뒹굴면서 유혹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러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욕정은 사라져 평온을 찾았습니다. 이후 그는 그런 유혹을 다시는 겪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장미밭이 수비아토 수도원에  남아 있습니다한편수도원에는 1224  프란치스코가 방문했다는 기록과 17세기에 그려진 그의 초상화 그림  점이 남아 있습니다아시시의  프란치스코도 어느 날 자신의 마음속에 솟아나는 죄악 된 생각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장미 밭에 들어가 뒹굽니다이때 하느님께서 장미의 가시를 모두 없애주셨습니다. 성 베네딕토와 성 프란체스코  사람 똑같이 가시밭을 뒹굴었는데 하느님은 성 프란치스코가 뒹군 장미밭은 가시를 모두 없애셨고, 성 베네딕토가 뒹군 가시밭은 그대로 남기셨습니다오늘날 수도원 아래 조그만  장 정원이 하나 있습니다이곳에  프란치스코가 아시시에 있었던 가시 없는 장미를 옮겨다 심어 놓았습니다그러나  장미는 지금도 아주 굵직한 가시를 내고 있습니다

부활 대축일과 예수님의 발현

예수 부활 대축일 날, 성 베네딕토는 질병으로 인해 전례 거행에 참석할 수 없어 기도하며 깊은 묵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수도원에서 부활절 축일 미사가 거행될 때 한 신부가 제단에 서서 성찬례 예식을 하는 순간 놀라운 환시를 보게 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나는 빛을 받으며 사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제에게 “너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지만 동굴에 있는 나의 종은 배를 곯고 있다."라며 축성된 성체의 일부, 즉 그리스도의 몸을 베네딕토에게 갔다 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제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축성된 성체의 일부를 조심스럽게 가져다가 성 베네딕토에게 전달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사제는 즉시 동굴을 찾아 나섰고, 어렵사리 베네딕토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베네딕토에게 가서 “어서 일어나서 성체를 드십시오. 오늘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저를 보내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과 격리되어 있던 베네딕토는 사실 그날이 예수 부활 대축일인지도 몰랐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개입에 깊은 감동을 받은 베네딕토는 깊은 경외심과 감사의 마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셨습니다. 성 베네딕토는 신성한 현존과 사랑으로 깊은 영적 황홀경을 경험했습니다. 이 만남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그의 믿음과 그의 영적 여정과 기도와 관상의 삶에 대한 헌신을 더욱 강하게 하였습니다.

성 베네딕토가 은둔했던 거룩한 동굴

성 베네딕토 수도원의 거룩한 동굴 

로마에서 남동쪽게 위치한 거룩한 동굴 수도원이라고 불리는 수비아코 베네딕토 수도원은 해발 800m 정도의 산꼭대기에 30m 정도의 깎아지른 절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BC304 로마 통치하에 4개의 수로가 건설되고 이곳 아니오 강에서 로마로 물을 공급하고 있었습니다네로 황제 때는 강의 댐을 막고 인공호수를 만들고 네로황제의 별장을 지었습니다 지역 이름이 호수 아래라는 뜻의 수블라키라고 불리다가 수비아코가 되었습니다.
성 베네딕토는 고독과 명상의 장소를 찾아 서기 500년경 수비아코에 도착하여 현재 거룩한 동굴(Holy Grotto)로 알려진 동굴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은둔자로 살았습니다. 이 고립과 강렬한 기도의 기간은 베네딕토의 영적 비전을 형성하고 미래의 수도 활동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베네딕토의 신앙심과 지혜에 대한 소식이 수비아코에 퍼지자 제자들은 그의 모범에서 배우고 그의 지도 아래 살고 싶어 그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비아코 지역에 여러 수도원이 설립되었습니다. 베네딕토는 초기 기독교 교회의 모델을 따라 12명의 수사로 구성된 12개의 작은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이 수도원들은 영적 쇄신과 배움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기도와 노동, 공동생활에 헌신하는 개인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중세 시대에 성 베네딕트 수도원은 대대적인 확장과 개조 공사를 거쳤습니다. 베네딕토회의 인기가 높아지고 순례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건물과 시설을 추가로 건설해야 했습니다. 수도원은 요새화되었고, 성장하는 수도원 공동체를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예배당과 회랑이 건설되었습니다. 이러한 발전으로 인해 수도원은 종교 및 문화 중심지로 변모하여 유럽 전역의 학자, 예술가 및 순례자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는 성 베네딕트 수도원에 더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 시대의 예술적, 건축적 경향의 영향을 받아 수도원에는 정교한 장식, 복잡한 프레스코화, 웅장한 제단이 추가되었습니다. 유명한 예술가들에게 수도원의 벽과 천장의 장식 제작을 의뢰했으며, 이러한 예술적 향상은 수도원 전체를 아름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화하는 취향과 문화적 영향을 반영했습니다. 거룩한 동굴(Sacro Speco)은 성 베네딕토 수도원의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베네딕토가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며 은둔자로 살았던 곳이 바로 이 동굴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베네딕토는 수많은 영적 계시를 경험하고 하느님과의 만남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와 성스러운 삶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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