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치운쿨라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안에 위치한 작고 소박한 경당으로, 원래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낡은 경당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초기 추종자들은 경당을 복원했으며, 이곳은 프란체스코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폭 4m, 길이 7m에 불과한 작은 경당에도 불구하고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는 기독교와 프란치스코회 역사에서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심오한 영적 계시를 경험하고 자신의 종교 공동체의 기초를 세운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포르치운쿨라 경당은 프란치스코 영성의 중심인 겸손, 가난, 성모 마리아에 대한 헌신을 상징합니다.
포르치운쿨라 경당과 프란치스코회
1) 프란치스코 수도회 설립배경
1208년 성 마티아 축일미사 중 낭독된 마태오복음에서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오 10:9~10)는 말씀을 듣고 큰 감명을 받으면서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삶을 통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삶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낡고 해어진 옷을 입고 지팡이도 없이 맨발로 돌아다니며 복음을 가르치고 회개하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새로 찾은 소명을 실천하면서 그의 급진적인 생활 방식과 복음에 대한 헌신에 영감을 받은 추종자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초기 동료들은 가난 속에 살며 복음을 전파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려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비전을 공유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여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렀으며, 그 수가 11명에 이르자 형제들의 생활양식에 대한 규정의 필요성을 깨닫고, " ‘생활양식’ 또는 ‘원회칙’이라는 제목의 짧고 단순한 회칙을 만들었는데, 이 회칙은 철저히 복음에 기초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추종자 수가 늘어나면서 성 프란치스코는 그들의 생활 방식에 대한 공식적인 승인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와 그의 동료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게 그들의 요청을 전달하기 위해 로마로 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의 겸손한 태도와 열정적인 호소가 결국 교황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그들이 제안한, "생활의 법칙"에 따라 살도록 구두 승인을 내렸습니다. 이 승인은 작은 형제회로 알려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공식적인 시작을 의미합니다.
2) 포르치운쿨라 경당
교황으로부터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구두 승인을 받고 아시시로 돌아온 그와 형제들은 한 헛간에 자리를 잡고 회칙에 따라 관상과 노동, 설교, 구걸을 병행하며 생활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농부가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헛간에 당나귀를 끌고 들어와 방해를 하자, 그들은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오늘날의 포르치운쿨라 경당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때부터 수도회의 영원한 요람이 되었습니다. 포르치운쿨라 경당은 성 프란치스코와 초기 동료들이 진흙으로 지은 움막이었습니다. 포르치운쿨라의 의미는 "아주 작은 몫의 땅"으로 아시시에서 약 4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소성당으로, 현재는 포르치운쿨라 경당 위에 그대로 성전을 지어, 천사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회개생활을 시작하고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를 하는 중에 걸려있던 다미아노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무너져 가는 내 집을 수리하여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일 먼저 수리한 곳은 다미아노 성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수리할 성당을 찾기 시작하여, 두 번째로 수리한 곳은 베드로 성당이며, 세 번째가 바로 포르치운쿨라 경당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 무너져가는 포르치운쿨라를 형제들과 진흙과 돌 등으로 재건하여 이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 경당과 주변의 땅은 베네딕토회 소유였기에 매년 생선 한 광주리로 사용료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전대사의 의미
가톨릭교회교리서 1471항에 의하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모두 면제받는 것을 전대사, 부분적으로 면제받는 것을 부분대사 또는 한대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지만, 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영혼에 새겨진 아직도 남은 "잠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돈을 훔친 사람이 회개를 통해 죄는 뉘우쳤지만, 아직 돈을 돌려주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은 죄에 대한 벌은 사함 받지만 잠벌은 여전히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잠벌은 연옥에서의 고통을 통해 갚아야 하는데 전대사를 통해 이러한 잠벌을 한꺼번에 면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대사의 유래는 초기 교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신자가 죄를 지으면 공동체에서 쫓아내기까지 했지만(1 코린 5, 2~13), 후에 죄인이 속죄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공동체에 다시 참여할 수 있었으며, 사도들 또한 교회 공동체가 죄인의 속죄를 위해 함께 용서를 간구할 것을 권유했습니다(야고 5, 16). 죄를 짓고 회개하는 사람은 교회가 정한 엄격한 보속을 실천하였고, 교회는 그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후 박해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는 배교했다가 참회한 신자들을 엄하게 단죄하기보다는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게 되었는데, 이것이 고해성사 제도의 도입으로 이어집니다. 고해성사 후 사제로부터 받은 보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거나 잊은 경우, 그 영혼은 연옥에서 잠 벌을 마저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연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해 살아있는 신자들이 대신 보속할 수 있는데, 기도와 미사, 성지순례 등의 신심행위가 보속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 때 교회에서 일부 전대사가 오용된 일이 있었습니다. 15세기 중엽, 전대사를 받기 위한 전제 조건 중 하나인 이웃을 위한 선행이 간편한 현금 지급으로도 가능해지면서, 한 때 전대사가 면죄부로 오인된 경우가 있었습니다. 전대사는 단순히 현금이나 단순한 몇 가지 선행에 의한 면죄부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 무한히 풍요롭다는 것을 보여주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옥 영혼을 위해 대리 보속으로 전대사를 얻어 건네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신경에도 나와있는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자, 신앙 공동체의 아름다운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법전 996조에 의하면 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은 신자로서 교회에서 파문처벌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또 대사를 얻겠다는 의사가 있어야 하고 교회가 수여하는 대사의 취지에 따라 정해진 선행을 정해진 시기에 합당한 방식으로 이행해야 하며 대사를 얻기 위한 일반 규정을 지켜야 합니다. 일반규정은 죄에 대한 모든 애착을 배제하고 교회가 지정한 선행을 해야 하며,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의 지향을 위한 기도 등 조건을 채워야 합니다. 보통 전대사는 25년마다 교황에 의해 선포되는 ‘정기 성년’과 성년이 아니라도 특별한 이유로 선포되는 ‘특별 성년’ 동안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신자들은 평상시에도 일정 기간에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데, 위령성월이 시작하는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연옥 영혼들을 위해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를 교회가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에 신자들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연옥에 있는 이들에게만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포르치운쿨라의 전대사의 은총
어느 날 밤 프란치스코 성인은 기도하는 동안 육적인 유혹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가시가 많은 장미 정원 위에 뒹굴었습니다. 유혹은 사라졌고 천사들이 나타나 그를 포르치운쿨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주님 제가 당신의 삶을 따라서 이렇게 회개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제 육신은 과거에 타락하여 즐겼던 그곳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완덕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곳에서 예수님과 성모님과 수많은 천사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을 환영하고 있는 환시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데, "프란치스코야, 너는 죄의 유혹을 잘 이겨냈다. 악마의 싸움에서 네가 승리를 하였으니 너에게 커다란 선물, 은총을 주겠다. 즉, 동정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네가 선물을 받을 수 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 제 주변에 회개의 삶을 살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회개하는 모든 이들에게 모든 죄와 벌을 사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십시오." 이 대답의 의미는 포르치운쿨라에서 전대사를 얻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청을 받아들여 "가서 주교에게 그 대사를 청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은 1216년 7월 31일 7명의 움브리아 주교들과 아시시에서 만나 포르치운쿨라를 축성하고 전대사를 공포하였으며, 성인은 아시시로 돌아와 예수님의 계시에 따라 쇠사슬의 성 베드로 축일인 8월 1일 오후기도부터 다음 날인 포르치운쿨라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인 8월 2일 저녁기도 사이에 이 전대사 축일을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특전은 아시시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교황들에 의해 전 세계의 모든 프란치스칸 성당들에 확대되었습니다. 전대사 조건은 첫째 포르치운쿨라 성당을 포함한 프란치스코회의 성당을 방문하여 기도를 하고,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바치며 고해성사와 성체를 받아 모셔야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교황님이 정해주신 각 달마다 정해진 지향기도를 할 때 전대사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죽음
1224년 프란치스코 성인은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았는데 육체적 고통 중에도 당나귀를 타고 움브리아 지방을 순례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기력이 쇠하여지고 눈마저 실명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쁨을 잃지 않고 기도와 성찰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창조물에 대한 사랑과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태양의 찬가"를 작곡했습니다. 움브리아 방언으로 쓰인 이 찬가는 모든 창조물의 일치를 찬양하고 자연의 요소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건강이 계속 악화되자 그는 마지막 몇 달 동안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보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미리 유서를 작성하고 동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했습니다. 형제들을 축복한 후 그는 옷을 완전히 벗고 움막 안 맨바닥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원장으로부터 수도복을 마지막으로 받았지만, 그 옷이 가난을 드러내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는 다른 헌 누더기로 바꿔달라고 하였고, 바지와 새끼띠와 두건을 받았습니다.
피곤한 프란치스코는 잠에 떨어졌으나 다음날 아침에는 너무나 큰 고통으로 눈을 떠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과 최후만찬을 하셨던 성 목요일을 생각하며 그는 빵을 가져오게 하여 축복한 후 떼어서 동료들에게 한 조각씩 나누어 누었습니다. 그 후 성서를 가져와 읽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최후의 순간임을 느끼고 다시 옷을 벗겨달라고 원장에게 부탁하며, "참으로 임종이 오면 나를 알몸으로 땅바닥 위에 눕혀 주십시오. 그리고 숨을 거두게 되면 느린 걸음으로 1킬로 걸을만한 시간 동안 나를 가만히 그대로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금요일이 지나고 토요일이 되자,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자신의 몸에 먼지와 재를 뿌려달라고 부탁하며, "곧 나는 먼지와 재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해질 무렵 그는 힘차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니 어서 저에게 오소서."로 시작하는 시편 141장 1절이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성 프란치스코는 시편 142장을 조용하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도가 끝나자 성 프란치스코는 영원한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일요일 새벽부터 돌아가신 성인을 추모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성인의 오상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이를 보려는 방문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성직자들은 유해를 운구하기 위하여 아시시에서부터 손에 올리브 가지와 촛불을 들었으며 나팔소리의 장엄한 행렬이 마을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이렇게 1226년 10월 3일 저녁, 포르시운쿨라(Porciúncula)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선종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형제들이 선택한 임시 안식처인 아시시의 산 조르조 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1230년 5월 25일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지만, 형제인 엘리야 수사의 요청에 따라 그의 무덤을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비밀리에 붙여졌습니다. 그 후 1818년 그의 무덤이 재발견되기 전까지 아무에게도 프란치스코 성인의 매장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