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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해외 성지순례 : 아시시의 성 글라라 대성당

by 루시아1004 2024.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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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성 글라라 대성당
아시시의 성 글라라 대성당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글라라 대성당은 건축학적 아름다움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가까운 추종자이자 수도회 창립자인 성 글라라의 마지막 안식처로서의 역할로 존경받는 중요한 종교적, 역사적 장소입니다. 또한 이 대성당은 성녀 글라라의 삶과 신앙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프란체스코 운동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에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순례자들은 그녀의 무덤을 방문하고, 기도하고, 중보기도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조용한 묵상과 영적 갱신을 위해 찾아옵니다.

성녀 글라라의 초기생애

성녀 글라라는 1194년 7월 11일 아시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모두 귀족 집안이며 아시시에서 뛰어난 명문가였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글라라를 임신하고 성당 십자가 앞에서 기도 중에 태어날 아기가 온 세상에 빛이 되리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기의 세례명을 "글라라" 즉,  "빛난다"라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어머니는 글라라를 어려서부터 깊은 신앙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었고, 신앙의 기본교리와 기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12세기 말엽 아시시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많았으며 비참과 곤궁의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글라라의 어머니는 이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였고 소녀 글라라 역시 어머니의 모범을 따라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려고 자기 몫의 맛있는 음식을 남겨두었다가 가난한 이웃에게 갖다 주곤 하였습니다. 
 
또한 글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인들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과 헌신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키웠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에 온 관심을 쏟았고, 그분에 관해서만 이야기하하였습니다. 글라라가 15세가 되었을 때 구혼자가 나타났는데 자신은 하느님께 봉헌했기 때문에 어떤 남자도 원치 않는다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글라라의 영적 여정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만났을 때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프란치스코의 회개생활은 온 아시시와 더불어 글라라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성 프란치스코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설교 허가를 받고 돌아와서 산 루피노 성당에서 강론을 하였습니다. 깊은 영성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가난은 하느님 안에서 모두 되돌려 받기 위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아시시의 부잣집 맏아들이 복음말씀 그대로 살기 위해 자신의 부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의 강론은 글라라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훗날 성 프란치스코처럼 온전한 봉헌을 하며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글라라는 성 프란치스코를 찾아가 자신의 의지를 밝히고, 이때부터 성프란치스코는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매의 작은 공동체

1) 글라라의 동경인 성 프란치스코

당시 프란치스코를 중심으로 모여든 12명의 젊은이들은 품삯도 요구하는 법 없이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고,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는 집집마다 동냥하러 다녔습니다. 힘든 노동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며 그들의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였습니다. 글라라는 이들에게 깊이 동경하여 마침내 프란치스코를 은밀히 만나기로 결심하였고, 프란치스코 역시 높은 성덕으로 널리 알려진 글라라와의 만남을 내심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소녀 글라라는 진솔한 말로 마음을 열어 보이며 하느님의 뜻을 좇아 부르심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였고, 프란치스코는 조용히 소녀 글라라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온전히 착하시고 어지시며 좋으신 분, 선과 사랑의 샘이신 창조주요 구세주이시며, 참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듣지도 찾지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숨 쉬지도 만족하지도 기뻐하지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맙시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2) 성 글라라의 결심

1212년 3월 18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리는 성주간의 시작인 성지주일에 글라라는 특별히 아름다운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친척들과 함께 성 루피노 성당의 성지 가지 축성예절에 참여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월요일에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해 줄 성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있는 작은 경당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달려갈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어 한 밤중에 살며시 방을 나온 소녀는 포르치운쿨라로 향했습니다. 한편, 포르치운쿨라에서는 성 프란치스코가 형제들과 함께 글라라의 도착을 기다리며 기도로 밤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기척이 들리자마자 손에 횃불을 들고 나와 그녀를 장엄하게 성당 안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제대 앞에 무릎을 꿇은 글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손길 아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였는데, 입고 있던 고급스러운 옷을 벗어 형제들에게 주고 그들과 같이 거친 옷으로 바꾸어 입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들고 있던 가위로 그녀의 황금색 머리를 자르자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땅에 떨어졌고 글라라는 두텁고 검은 머릿수건(베일)을 받아썼습니다. 이것은 가난, 순결, 순종이라는 새로운 삶을 상징하는 종교 단체에 입문하는 여성의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축일날 성당에서 신던 수놓은 구두 대신 맨발에 나무 샌들을 신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성 프란치스코에게 순종 서약을 하듯이 글라라도 프란치스코를 장상으로 모시고 세 가지 서약을 하였습니다. 

3) 성 글라라의 첫 제자

예식 후 성 프란치스코는 베네딕토회 수녀원의 보호 아래 그녀를 두기 위해 아시시 외각에 있는 성 바오로 대수도원으로 소녀를 데리고 갔습니다. 글라라의 가출을 뒤늦게야 알게 된 가족들은 여기저기 딸의 행방을 알아보다가 이를 알게 되었고 수녀원으로 찾아갔습니다. 글라라는 성당 안에서 그들을 맞았는데 조금도 동요되지 않은 모습으로 제대를 덮은 제대보를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몰려온 가족들이 완력을 쓰려하자 그녀는 자기 머리에 쓰고 있던 머릿수건을 벗고 삭발한 머리를 보여주자 그들은 확고한 그녀의 결심을 알고 할 수 없이 돌아갔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글라라를 보호하기 위해 당시에 은둔 형태의 수녀원인 평화의 거룩한 천사 수녀원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녀가 집을 나온 지 열엿새가 되던 날, 어린 동생 아녜스가 집을 나와 수녀원을 찾아와, 주님만을 섬기기 위해 왔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자기와 같은 길로 불러주시기를 항상 기도해 온 글라라는 동생을 영적 자매로 허락하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동생 아녜스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가난 안에서 글라라의 첫 제자가 되었습니다. 

4) 공동체의 시작

아녜스의 가출을 알게 된 아버지는 이번만은 딸을 반드시 집으로 데려오리라 작정하고 부하 장정 열둘을 거느린 숙부를 수녀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장정들이 아녜스를 질질 끌고 출구를 향해 가는데 그녀는 울부짖으며 상상도 못 할 힘으로 저항했고, 화가 난 숙부는 아녜스의 머리를 내리 치려고 했으나 몸의 절반이 마비되어 뻣뻣해지고 팔은 움직일 수가 없고 한쪽 눈은 보이지 않게 되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며칠 후 아녜스는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고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글라라와 아녜스를 아시시 성 밖의 산 다미아노로 옮기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글라라는 마흔두 해의 생애를 이 담장 안에서만 살았습니다. 산 다미아노로 옮겨온 후 오래지 않아 많은 소녀들이 찾아와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의 새로운 복음적 공동체에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가난한 자매가 되어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좇아 살기를 원하며 공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다미아노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3년 후에 글라라는 대수도원장의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성체현시 때 사용되는 성광

성 글라라의 기적

1240년경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용병인 사라센족이 아시시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 침략자들은 잔인함으로 유명했고, 아시시 사람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사라센 군대가 글라라와 자매들이 살고 있는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 접근하자 공동체는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글라라는 중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용기와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녀는 수녀들에게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지시하고 전진해 오는 군인들을 바라보며 성벽으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글라라는 수녀들과 수녀원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후, 성체현시 때 사용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넣는 성광을 들고  사라센군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사라센인들은 수도원 성벽에 도달하여 방어선을 뚫을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그들은 글라라가 들고 있는 성광에서 이상한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 압도적인 경외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수도원이나 그 주민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퇴각했습니다. 이 기적적인 사건은 기도의 힘과 성찬례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믿음을 강화시켰습니다. 글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있어서 성체의 기적은 그들의 믿음과 하느님의 보호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성녀 글라라는 1253년 8월 11일에 세상을 떠났고, 처음에는 산 조르조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그녀가 죽은 지 7년 후인 1260년에 그녀의 시신은 새로 건설된 성 글라라 대성당 내의 새로운 안식처로 옮겨지기 위해 발굴되었습니다. 당시 발굴 과정에서 그녀의 시신은 부패 흔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 현상은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들과 하느님의 은총의 표시로 간주됩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포함한 증인들은 그녀의 시신 상태를 입증했으며 이러한 증언은 바티칸으로 보낸 문서에 포함되었습니다. 기적적인 시신의 보존은 글라라의 거룩함과 그녀의 뛰어난 미덕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1255년 9월 26일,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글라라를 성인으로 시성 했으며, 그녀의 부패하지 않은 시신의 기적은 이 결정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아시시의 성 글라라 대성당

성녀 글라라는 1255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 의해 시성 되었는데 시성식 이후, 그녀의 유해를 안치하고 그녀의 삶과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그녀를 기리는 성당을 짓기로 결정되어, 그녀가 죽은 지 4년 후인 1257년에 프란체스코회의 지시에 따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성당은 성 프란치스코가 한때 설교했던 산 조르조(San Giorgio) 성당 부지에 세워졌으며,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옮겨지기 전에 그의 시신이 처음 묻혔던 곳입니다. 성 글라라 대성당은 1260년에 완공되었으며, 그녀의 유해는 엄숙한 의식을 통해 그곳으로 옮겨졌습니다.
 
성 글라라 대성당은 프란체스코 운동의 영향력과 확산을 반영하여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 특징입니다. 외관은 분홍색과 흰색 돌을 사용하여 독특한 줄무늬 패턴을 만들어 교회의 시각적 매력을 더해주고, 가난과 겸손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반영하여 단순하고 꾸밈이 없으며, 성당 입구 자체는 뾰족한 아치와 최소한의 장식 요소로 소박하며 단순합니다. 내부 벽은 성녀 글라라, 성 프란치스코, 프란체스코회와 관련된 다른 성인들의 생애 장면을 묘사한 프레스코화와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대성당의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는 성 글라라의 무덤이 있는 지하실입니다. 지하실은 성녀 글라라의 유해에 적합한 안식처를 제공하고 순례자들이 성녀를 공경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건축되었으며, 무덤 자체는 글라라가 평생 동안 구현한 겸손을 반영하는 단순하면서도 위엄 있는 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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