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작은 루르드라고 알려진 카스텔페트로소 대성당(고통의 성모 대성당)은 매년 수천 명의 순례자를 끌어들이는 이탈리아의 중요한 종교 유적지입니다. 그 기원은 1888년에 발생한 고통의 성모 마리아가 돌아가신 예수님과 함께 발현하셨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들은 종종 현장을 방문하고 고통의 성모님께 기도한 후 육체적 치유, 영적 회심 및 축복을 보고합니다. 카스텔페트로소 대성당은 1975년에 완공되었으며, 이는 지역 공동체와 더 폭넓은 가톨릭 교회의 거의 85년에 걸친 헌신과 노력의 정점을 의미합니다.
고통의 성모 발현
첫 번째 발현
1888년 3월 22일 비비아나(Bibiana)로 불리던 파비아나 치키노와 세라피나 발렌티노(Serafina Valentino)는 카스텔페트로소 근처에서 땔감에 쓸 나무를 구하고 양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하여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데리고 온 두 마리 양 중 한 마리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고, 비비아나와 세라피나는 각자 길을 나누어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후 양을 찾은 비비아나는 근처 작은 바위에서 평소와는 다른 강한 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호기심에 그녀는 빛이 있는 바위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아래 돌아가신 아들 예수님과 함께 계신 성모님을 목격하게 됩니다. 일곱 개의 칼이 심장을 꿰뚫고 피가 흘렀으며 슬픈 자세로 무릎을 꿇고 계셨습니다. 놀란 비비아나는 즉시 소리쳐 세라피나를 불렀으나 그곳에 세라피나가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성모님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짐을 정리해서 집으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발현하신 성모님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존재는 슬픔, 연민, 모성애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첫 번째 발현의 의미는 마리아의 고통과 슬픔의 구원의 힘을 강조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신자들 사이에 회개와 더 깊은 헌신을 촉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심장을 찌르는 일곱 개의 칼의 이미지는 성모 마리아가 견디어야 했던 고통과 희생을 강조하며, 신자들이 자신의 시련을 되돌아보고 신앙에서 위안을 구하도록 권유합니다.
두 번째 발현
1888년 4월 1일에 파비아나와 세라피나는 그 언덕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4월 1일은 당시 부활절이었는데 이번에도 예수님과 일곱 개의 칼에 꽂혀 슬픔에 잠긴 모습으로 성모 마리아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녀들은 마을에 가서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발현 후 소문은 매우 빠르게 퍼져 나가게 되었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순례를 오기 시작하면서 이탈리아 전국으로 퍼지게 됩니다. 그러던 중 발현소식이 시칠리아의 한 신문에 실리게 되는데 특별히 두 사람이 관심 있게 봅니다. 한 분은 당시 교황이셨던 레오 13세이고, 한 분은 볼로냐의 귀족 카를로 아쿠아데르니였습니다. 카를로 백작은 이 사건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에게는 당시 12살 난 아우구스토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불치병으로 여기던 골결핵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888년 7월 비비아나는 샘을 발견하게 되고, 그해 11월 카를로백작은 아들과 함께 방문하여 샘의 물을 마시고 병이 낫게 됩니다.
성모님 발현 소식은 당시 바티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는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교황 레오 13세는 마침 주교회의 참석차 로마에 머물던 관할 교구의 교구장이었던 팔미에리 주교를 불러 직접 조사하여 보고해 줄 것을 당부하셨고, 이에 팔미에리 주교는 조사를 수행하기 위하여 1888년 9월 26일 직접 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러고 팔미에리 주교는 교황님에게 보낸 서신에 "처음에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고 바위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돌아가신 예수님과 함께 계신 성모님의 발현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말했던 그 모습대로의 성모님였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회개하라 하시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마지막 자비의 빛입니다."라고 서술하였습니다.
세 번째 발현
세 번째 발현은 1888년 4월 5일에 일어났으며, 카스텔페트로소에서 일어난 사건의 영적 의미를더욱 확고히 했습니다. 이번에도 파비아나와 세라피나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현장에 모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모님은 고통의 성모로 등장했는데, 이번에는 그녀의 표정에서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으면서도 희망과 모성애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발현에서 성모님은 마치 신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도움과 인도를 구하도록 초대하는 것처럼 전구의 몸짓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증인들은 성모 마리아와의 강렬한 유대감을 느꼈고, 성모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중재하려는 의지와 공감을 느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발현은 성모님 자신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그녀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지원의 원천이 된다는 생각을 강화했습니다.
세 번째 발현의 희망과 중보의 메시지는 신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으며, 그들은 성모님께서 그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고 도움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믿음에서 위안을 찾았습니다. 이는 고통의 성모님에 대한 기도와 신심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신자들이 자신의 슬픔과 짐을 성모님의 보살핌에 맡기도록 격려했습니다. 이후 성모님 발현은 1950년도까지 계속 이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습니다.
발현하신 성모님 모습의 신학적 의미
고통의 성모로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일곱 개의 칼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 슬픈 자세로 무릎을 꿇고 양팔은 벌린 채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여주시며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일곱 개의 칼은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을 의미합니다. 즉 성전에 아기예수님을 봉헌할 때 시메온이 칼이 마리아의 영혼을 꿰지를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루카 2:35), 마리아와 요셉이 헤롯왕으로부터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신했을 때(마태오 2:13-15), 소년 예수님을 잃어버리시고 사흘 동안 길을 헤매었을 때(루카 2:41-50), 성모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루카 23:27-3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동안 성모님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실 때(요한 19:25-30),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성모님 품에 안겼을 때(요한 19:31-37),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셨을 때(요한 19:38-42), 등 어머니로서 자식을 죽음으로 잃게 된 성모님의 고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반쯤 무릎을 꿇고 계시는 것은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의미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의 삶과 인간의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곧 다가올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이미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발현하신 모습의 의미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고, 희망을 주십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슬픔과 고통의 순간이 오히려 부활에 대한 희망의 시작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의 옷이 아닌, 생명과 부활을 의미하는 색의 옷을 입고 계십니다. 이에 발현의 가장 신학적 의미는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 더 큰 희망을 가져오고, 더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의 샘
카스텔페트로소 발현과 관련된 가장 놀라운 현상 중 하나는 기적적인 샘의 발견이었습니다. 1888년 7월 평소처럼 이곳을 방문해 기도를 바치던 비비아나는 어느 순간 갈증을 느꼈고, 이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성모님이 발현하신 장소 가까이에 평소에 보지 못했던 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에 갈증을 느꼈던 그녀가 손으로 물이 나오는 곳을 파기 시작하자 샘이 솟아올랐고 그녀는 샘의 물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의 성모님 발현 소식은 시칠리아의 한 지역 신문을 통하여 기사화되었고, 이 기사를 우연히 보았던 볼로냐에서 월간지 출판사 사장 카를로 아쿠아데르니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당시 12살 난 아우구스토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불치병으로 여기던 골 결핵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카를로는 11월 아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하여 아들의 치유를 구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 아우구스토에게 기적의 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게 했고, 물을 마신 아우구스토는 즉시 병이 치유되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를 진료했던 의료진들로부터 그의 병이 완전히 치유되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첫 번째 치유의 기적으로 기록되었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기적들이 보고되었는데, 샘물에서 목욕을 시킨 후 심각한 질병을 치료받은 어린 소년이나, 발현 장소에서 기도한 후 걸을 수 있게 회복한 한 여성 등, 이러한 기적들과 회개는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증언되고 있습니다. 카를로는 아들이 치유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곳을 기념하는 최초의 기념 성당을 건립할 계획을 추진하게 됩니다.
카스텔페트로소 대성당
성모님께서 팔미에리 주교에게 발현하심으로써 주교님은 아주 특별한 발현증거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초자연적인 특별한 사건임을 교황님께 증명하였습니다. 그 후 성지 조성 위원회가 설립되어 성지 건설 착수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의 불치병이 치유된 백작은 성모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유명한 건축가 프란체스코 괄란디에게 성당 건축을 의뢰하게 됩니다. 1890년 9월 28일 새 성전 건립의 첫 주춧돌을 놓는 미사와 함께 성전 건립이 시작되어 85년 후인 1975년 9월 21일 새 성전이 축성되었습니다. 성모님 발현 후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오기 시작했습니다. 폴란드인들이 첫 해외 순례단이었고 그리고 그곳에 폴란드 성당으로 첫 성당을 봉헌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그 지역의 가정 형편을 생각하여 성당에서는 어린이 위탁시설을 운영했습니다.
신고딕 양식으로 디자인된 대성당은 발현의 본질과 고통과 구원의 주제를 반영하는 상징적 요소를 특징으로 합니다. 대성당 곳곳에 다양한 예술 형태로 묘사된 성모님의 심장을 관통하는 일곱 개의 검은, 성모님이 느끼는 일곱 가지 슬픔과 고통의 구원의 힘을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이 대성당에서는 매년 9월 15일에 고통의 성모님께 봉헌되는 축제가 열립니다. 이 날은 특별한 전례, 행렬, 신심 행위로 기념되며, 성모님께 대한 헌신과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찾아오는 더 많은 순례자들의 군중을 끌어들입니다. 1973년 복자 교황 바오로 6세는 이곳에서 발현하신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몰리세주의 주보성인으로 공식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2013년 9월 21일 성전은 바실리카 미노레(Basilica Minore)로 승격되었습니다. 1995년 3월 19일 처음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은 폴란드인과 몰리세에 아주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2014년 7월 5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문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