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은 중요한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장소로 나보나 광장 근처의 캄포 마르지오 지역에 위치한 이 성당은 풍부한 건축 유산, 예술적인 보물,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어머니인 성 모니카와의 연관성으로 유명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의 연관성은 1430년에 성당으로 유해가 옮겨진 그의 어머니 성 모니카의 유적이 존재함으로써 더욱 강조됩니다.
성녀 모니카의 어린 시절
성녀 모니카는 332년 현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작은 마을인 타가스테에서 태어습니다. 그녀의 양친은 신심이 두터웠으나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래도 모니카는 선량한 성격을 지닌 착하고 온순한 아이로 성장했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어 기도를 위해 성당에 가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하였습니다. 또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먹을 것까지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등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그녀는 부모로부터 기도, 금식, 자선의 중요성을 배웠으며 이것이 그녀의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습니다. 신앙과 미덕에 대한 이러한 초기 교육은 그녀의 영적인 힘과 회복력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이교도가 대다수인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려면 용기와 확고함이 필요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모니카의 뿌리 깊은 신앙은 그녀가 나중에 결혼하고 어머니가 되는 데 따르는 시련에 맞서도록 준비시켜 주었습니다. 사회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을 확고히 유지하는 그녀의 능력은 초기 기독교 교육의 강점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녀 모니카의 결혼
모니카는 부모의 뜻에 따라 22세에 로마 이교도인 55세의 파트리키우스(Patricius)와 결혼했는데, 남편은 가난한 데다 방탕한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 신념과 도덕적 가치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니카는 자신의 기독교 원칙을 지키겠다는 결심과 의무감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모니카와 파트리키우스의 결혼 생활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폭력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고 종종 모니카의 기독교 가치관과 모순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불신앙과 가혹한 태도로 유명했고, 이는 모니카에게 심각한 감정적, 영적 도전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독교인의 관용의 미덕을 구현하면서 놀라운 인내와 은혜로 이러한 역경에 직면했습니다. 남편의 행동에 대한 모니카의 반응은 맞서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인내와 기도였습니다. 그녀는 신앙의 변화시키는 힘을 믿었고 모범적인 행동을 통해 파트리키우스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했습니다. 시어머니도 매우 까다로운 성격으로 어린 모니카를 괴롭혔지만 모니카는 끊임없는 기도와 인내로써 남편과 시어머니를 하느님께로 인도했습니다. 20년 가까운 그녀의 인내와 신앙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헌신은 마침내 “좋은 열매”를 맺었던 것입니다. 파트리키우스는 모니카의 확고한 태도에 감동을 받아 세례성사를 받고 그 이듬해인 37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개종은 모니카의 영향력과 그녀의 끈질긴 기도의 힘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모니카 부부는 세 자녀를 두었는데, 장남 아우구스티누스와 차남 나비기우스와 딸 뻬르뻬뚜아였습니다. 아래의 두 자녀는 어머니의 성품을 닮았지만 장남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방탕
남편이 세상을 떠나던 해에 18세이던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는 집에서 먼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는 사춘기 무렵부터 자신의 표현대로 “정욕의 가시덤불”에 휩싸여 살았으며, “공범을 강요하는 우정”에 빠져 살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에서 벗어나 진리와 의미를 탐구하면서 그는 페르시아 예언자 마니(Mani)가 창시한 이원론적 종교인 마니교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러한 매력은 그를 기독교 신앙과 멀어지게 하여 도덕적 상대주의와 영적 혼란의 삶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카르타고에 있는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적 만족과 도덕적 방종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열입곱 살에 한 젊은 여성과 동거생활을 시작하여, 그가 정혼하기 전까지 14년 동안 같이 살면서 사생아 아데오다투스(Adeodatus)를 낳았습니다. 그의 쾌락 추구는 성적 방종을 넘어 확장되었습니다. 그는 극장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여 감정적 자극과 삶의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추구했습니다. 당시의 연극 공연은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으며, 나중에 그는 이러한 광경이 어떻게 그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는지, 그리고 그를 영적 진리에서 더욱 멀어지게 했는지에 대해 성찰했습니다. 어머니의 열렬한 기도와 그를 그리스도교로 인도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공개적으로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종
383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곁에 늘 붙어있는 어머니를 몰래 따돌리고 로마로 떠났습니다. 당시 밀라노의 주교는 성 암브로시오였는데, 그는 박학한 지식과 깊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강론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오 주교를 찾아갔으며, 점차 주교의 친절함에 매료되어 그의 강론에 귀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와 그의 강론 내용에 점점 이끌리고 있었는데 그때는 마침 자신의 여러 내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때였습니다. 심란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택 정원을 거닐며 고민하고 있던 순간, 어디선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뭐라도 집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에 들어와 눈에 띄는 책을 집어서 펼쳤는데, 그건 바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3장 13절로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강한 충격을 받고 개종을 결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386년 8월 그의 지인들과 카시키아쿰의 별장에서 한동안 머무르며 암브로시오 주교한테 예비자 교리를 받게 됩니다. 마침내 387년 4월 25일 부활 성야에 아우구스티누스와 당시 열다섯 살이던 그의 아들 아데오다투스는 암브로시오 대주교에게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과 교회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32세였으며 15년 동안 동거했던 여인은 그의 회심을 알고 곁을 떠났는데, 전승에 따르면 그녀 역시 회심하여 수녀원에 들어가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로마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
로마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칭송하는 나보나 광장이 있습니다. 나보나 광장에서 북쪽 출구로 나가서 오른편으로 1분만 걸어가면 성 아우구스티노 광장이 있는데, 그 광장에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불리는 성 아우구스티노를 기념하는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Basilica di Sant'Agostino in Campo Marzio)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기독교 신학을 형성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 아버지 중 한 명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387년 근교 항구도시 오스티아 티베리나(Ostia Tiberina)에서 선종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수세기 동안 오스티아 안티카에 있는 성녀 아우레아 성당에 성녀의 유해를 모셨습니다. 이후 성녀의 유해는 마르티노 5세 교황의 명에 따라 로마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이 바로 현재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 중앙 제대 왼편에 위치한 부속 경당, 곧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의 어머니에게 봉헌된 경당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은 추기경이자 궁무처장이었던 데스투트빌의 후원으로 1483년에 건립되어 성인에게 바쳐진 성당으로 1761년에 대규모로 개조되었습니다. 이 경당에는 1885년 프레스코 화가 피에트로 갈리아르디(Pietro Gagliardi)가 프레스코화 기법으로 그린 모니카 성녀의 여러 일화로 아름답게 장식돼 있습니다. 그리고 경당 내 중앙제단 아래에 성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으며, 왼쪽 벽면에는 오스티아에서 옮겨온 그녀의 옛 석관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성당의 장엄함을 더해주는 대리석 기둥과 복잡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지오반니 바티스타 파로디가 그린 천장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의 장면들과 성경적 주제들로 그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