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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해외성지 : 폼페이 묵주기도의 복되신 성모 대성당과 바르톨로 복자

by 루시아1004 2024.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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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묵주기도의 복되신 성모 대성당
폼페이 묵주기도의 복되신 성모 대성당

 

폼페이에 있는 "묵주기도의 복되신 성모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마리아 성지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이는 신앙과 헌신, 묵주기도의 힘뿐만 아니라 복자 바르톨로 롱고의 놀라운 삶과 사명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많은 순례자들이 이 성지를 방문하고 묵주기도를 한 후 기도에 대한 응답, 치유, 개종을 보고했습니다.

복자 바르톨로 롱고의 생애 

"묵주기도의 참된 사도"로 불리는 바르톨로 롱고(Bartolo Longo)는 1841년 2월 10일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인 라시아노의 부유하고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성모신심이 깊고 묵주기도에 대한 사랑이 깊은 신앙인이었습니다. 바르톨로는 무례하고 장난꾸러기이며 불같은 성격을 가진 꼬마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하고 신부들의 가르침과 좋은 모범을 통해 신앙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롱고가 10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의 어머니는 변호사와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교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바르톨로는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하여 1861년 나폴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1860년대 반가톨릭 정권이 이탈리아를 장악하게 되었고, 바르톨로와 그의 형제는 고향을 떠나 나폴리로 가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폴리 대학 교수들은 사제와 가톨릭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바르톨로에게 나폴리 대학은 위험한 장소였으며, 이미 신앙에서 멀어진 그는 세상적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바르톨로는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심령술과 사탄숭배 사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스승을 존경하여 그의 말에는 무조건 복종하였는데 그들의 반가톨릭 사상과 교황에 대한 불신과 무신론 사상은 바르톨로를 비롯하여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르톨로는 수도사, 사제, 교황, 특히 도미니카인들을 미워하게 되었고, 깊은 내면의 어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진리에 굶주려 있었지만, 사탄 숭배 집단과 심령술 모임에 참석하여 영매의 설교를 듣거나 영으로부터 메시지를 전달받는 등의 영적 체험을 한 후,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았다고 믿었습니다. 

사탄의 사제가 된 바르톨로 롱고의 회개

1) 바르톨로의 갈등

새로운 사상을 탐구하기를 열망하고 교회에 환멸을 느낀 바르톨로는 영매술과 악마와의 접촉에 깊이 빠져들었는데,  악마는 영매를 통해 바르톨로의 질문에 모두 대답하여 그의 호기심을 유도했으며, 죽은 사람이나 천사로 가장했습니다. 그러나 악마의 대답은 모순적이었고 종종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바르톨로는 악마로부터 계시를 직접 받기 위해 마침내 사탄의 서품식을 받아 영매의 사제로 임명되고 무아지경에 빠져 수많은 영혼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의 사탄적인 봉헌의 순간, 엄청난 천둥소리가 났으며 형체가 없는 비명소리가 공중을 가득 채웠습니다. 번개가 번쩍이고 건물이 흔들렸으며 불경스러운 줄무늬가 나타나고 무서운 슬픔과 피로가 바르톨로를 사로잡아 악몽과 환상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2) 사탄의 사제

사탄의 사제가 된 바르톨로 롱고는 가톨릭 신앙을 모독하고 어둠의 힘을 불러일으키는 의식을 주도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이러한 의식에는 종교적 상징에 대한 모독, 어두운 의식의 수행, 신성 모독적인 기도의 낭송이 포함되었습니다. 바르톨로는 후에 그 의식이 공포와 악의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끔찍하고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었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더 깊이 들어갈수록 그는 극심한 불안, 우울증, 끊임없는 절망감에 시달렸으며 혼돈상태에 빠졌습니다. 그가 자신이 활용하려고 했던 바로 그 사탄의 힘에 의해 점점 더 고통을 받고 있음을 깨달았고, 악몽과 환각,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의 사탄적 활동의 심리적 영향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극심한 두려움과 편집증을 경험했으며 자신이 악마의 세력에 의해 쫓기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또한 육체적 질병에 시달렸는데, 이는 그가 신비주의와 연관되어 발생한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한때 유망했던 그의 학문적 경력은 좌절되었고, 그는 어둠과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나중에 바르톨로는 절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자살을 고려했다고 말했습니다

3) 바르톨로의 회개

바르톨로는 영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는데, 특히 가톨릭에서 자란 시절의 기억과 자신이 하느님께 등을 돌렸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습니다. 그가 사탄 의식에 외적으로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가 한때 느꼈던 하느님의 은총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믿음의 빛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 친구 빈첸초 페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페페는 바르톨로가 경험한 모든 것은 거짓이며 속임수로 결국 정신병원으로 가게 될 것이고 저주를 받게 될 거라고 말하며 가톨릭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바르톨로는 페페에게 도미니코 수도회 알베르토 신부를 소개받아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면서 점차 사탄의 사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알베르토 신부는 그에게 묵주기도를 가르치고, 그를 성모님과 함께 삼위일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영성생활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긴 참회의 시간을 보낸 후 1871년 10월 7일 바르톨로는 도미니코 제3회원이 되어 묵주기도를 사랑하고 널리 전하라는 뜻의 "로사리오 형제(Brother Rosario)"라는 이름을 받게 됩니다. 그날은 묵주기도의 성모님 기념이었으며, 그의 삶에서 회개의 날로 기록되었습니다.

묵주기도에 대한 서원

1872년 10월 어느 날, 변호사인 바르톨로 롱고는 마리안나 백작 부인의 토지 관련 업무를 처리하려고 폼페이로 갔습니다. 폼페이는 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23km 떨어진, 로마제국 시대에는 매우 크고 번성한 도시였으나, 79년 베수비오 산의 화산 폭발로 잿더미에 묻혀 있다가 부분적으로 발굴되어 그 폐허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폼페이에 도착한 바르톨로는 무너진 벽과 텅 빈 거리를 걸으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폼페이의 황폐함은 그가 영매술과 사탄주의에 빠져 몇 년 동안 경험했던 영적 황폐함을 반영했습니다. 이제 순식간에 파괴된 도시의 잔해를 걸으며 그는 과거의 죄의 무게와 구원의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세상과 미신에 빠져 있던 자신의 예전 모습을 되돌아보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네가 진정 구원받고 싶다면 묵주기도를 전하여라. 이것은 마리아의 약속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순간 그는 너무 놀라서 기절할 뻔했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묵주기도를 전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고 당신이 도미니코 성인에게 하신 약속이 사실이라면, 저도 구원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저는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묵주기도를 전하기 전에는 이 도시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 멀리 떨어진 성당에서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이 울려 그는 땅에 무릎을 꿇고 삼종기도를 바쳤습니다. 이 메시지는 구원에서의 성모 마리아의 역할과 구원으로 가는 길(수단)로서의 묵주기도, 그리고 묵주기도를 전파함으로써 복음화에서 평신도의 역할을 나타냅니다. 묵주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의 신비 속으로 인도하는 명상적 수행입니다. 묵주의 20가지 신비는 각각 예수님과 성모님의 삶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이며, 가톨릭 신앙의 핵심 진리에 대한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바르톨로는 묵주기도가 구원을 위한 강력한 도구이며, 악의 세력과 싸우고 성모님을 통해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한때 황폐했던 폼페이의 폐허는 바르톨로 롱고가 그날 들은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에 희망과 은혜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녀 성화

바르톨로는 묵주기도 전파가 자신의 과거 죄를 속죄하는 방법이자 하느님과 교회를 섬기겠다는 서원을 이행하는 방법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부르심이 있은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곳 지역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묵주를 나주어 주고, 사람들에게 묵주기도와 묵주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묵주기도는 그들을 악으로부터 보호하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영적인 무기임을 알렸고, 묵주기도로 인해 자신의 과거의 어둠을 어떻게 극복하고 영혼에 평화를 찾았는지에 대한 신앙체험을 공유하였습니다.

바르톨로는 폼페이 주민들의 신앙을 되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동안, 이 마을에 묵주기도와 관련된 성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875년 10월, 그는 도미니코회 사제에게 폼페이에 적합한 성모 마리아 성화를 얻고 싶다는 소망을 털어놓게 됩니다. 그 사제는 “몇 년 전에 내가 고물상에서 3프랑을 주고 산 묵주기도 성모님 성화를 포르타 메디나에 있는 로사리오 수녀원의 마리아 골레티 수녀님에게 선물했어요. 우선 성화를 보고 맘이 있으면 그 수녀님에게 부탁해 봐요.” 라며 알려주었습니다.  수도원을 찾아간 바르톨로는 가로 1m 세로 1.4m의 상태가 좋지 않은 성화를 직접 운반하지 못하고 짐꾼에게 맡겼는데, 짐꾼은 성화를 종이로 싼 후 이웃 마을에 갈 퇴비 위에 얹고서 운반했습니다. 마침내 1875년 11월 13일에 폼페이에 도착하여 성화는 오래된 교회에 보관되었고, 바르톨로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성화 앞에서 묵주 기도를 드렸습니다. 

로사리오 수녀원원에서 가지고 온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녀 성화

묵주기도 신심회와 성전기금

폼페이의 작은 성당에 도착한 성화는 묵주기도에 대한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면서 오늘날에도 “폼페이의 성모님”으로 크나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화 속의 성모님을 성당 한쪽에 모신 가운데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드디어 1876년 2월 13일 폼페이에서도 ‘묵주기도 신심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묵주기도 신심회’는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묵주기도의 사도라는 특별한 사명을 수행한 도미니코 성인에게서 시작되어 세계 곳곳으로 전해졌으며, 초기 한국교회에도 도입되어 ‘매괴회’라는 한자 이름으로 알려졌습니다. 묵주 기도에 대한 신심이 커지면서 폼페이의 작고 황폐한 교회는 더 이상 늘어나는 순례자를 수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바르톨로는 특유의 결의와 신앙으로 묵주 기도의 성모에게 바치는 웅장한 대성당을 건설할 것을 구상했습니다. 후에 1876년 5월 8일, 새 성당의 초석이 놓였고 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성화는 폼페이 교회에 큰 의식과 함께 설치되었는데, 이 행사는 폼페이에서 묵주기도 신심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렸으며 빠르게 기세를 얻었습니다. 바르톨로의 헌신과 묵주기도의 영적인 힘은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이 성화와 관련된 기적과 기도에 대한 보고는 신심의 확산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당시 나폴리의 12세 소녀 루카레리는 심한 간질병을 앓고 있었는데 증상이 너무 악화되어 의사들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때 그녀의 보호자인 숙모는 가엾은 조카를 고쳐주시면 폼페이에 새 성당을 짓도록 봉헌하겠다고 성모님께 약속드렸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폼페이에서 묵주기도 신심회(매괴회)가 시작된 바로 그날 완전히 건강한 몸이 되었습니다. 성당 건립의초석이 놓이고 정확하게 한 달 후인 6월 8일, 폐병 3기에 시달리던 조반니와 무타 부인은 폼페이의 성모님께 기도하였는데, 성당에 모셔 놓은 성모님 성화와 똑같은 모습으로 성모님께서 나타나셔서  “폼페이의 묵주기도의 동정녀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부인은 병상에 누워 있었기에 그 성화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부인은 그 즉시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성모님께서는 성당 건립에 필요한 비용을 모아주셨습니다.

묵주의 9일 기도의 기원

대성당 공사가 한창이던 1884년 나폴리에 사는 사령관의 딸 포르투나 아그렐라는 중병으로 1년 넘게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었고, 의사들도 이미 가망이 없다고 이야기를 한 상태였습니다. 1884년 2월 16일 그녀의 가족은 아그렐라의 건강을 위해 묵주의 9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월 3일, 성모님이 아그렐라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온갖 꽃으로 장식한 옥좌 위에 앉아계셨는데, 무릎 위에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묵주를 손에 들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도미니코 성인과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와 함께 있었습니다. 아그렐라는 성모님께 "거룩하신 로사리오(묵주기도)의 모후여, 저에게 건강을 되찾게 해 주소서"라고 간청하였더니 성모님께서는 "얘야, 너는 여러 이름으로 나를 불러 내 마음을 즐겁게 하는구나. 이제 너는 나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로사리오의 모후라고 불렀으니, 네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구나. 너는 묵주의 9일 기도를 세 번 바쳐라. 그러면, 넌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하고 응답하셨습니다. 이후 아그렐라는 완치되었고 그해 5월 8일 성모님은 다시 발현하셔서 "누구든지 나에게 간구하여 은총을 바라는 사람은 청원의 뜻으로 세 번의 9일 기도, 감사의 뜻으로 세 번의 9일 기도를 묵주기도로 바쳐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교황청의 인가를 받고, 성모님께 드리는 묵주의 9일 기도가 공식화되어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27일 동안 청원의 뜻으로 그리고 이어서 27일 동안 감사의 뜻으로 총 54일의 9일 묵주기도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후 레오 1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2세, 프란치스코 교황들의 요청에 의해 묵주기도는 계속 권고되어 왔습니다. 

바르톨로 롱고 복자의 모습

폼페이 묵주기도의 복되신 성모 대성당

순례자의 수가 늘어나고 묵주기도 신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바르톨로는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의 작은 교회로는 순례자들을 수용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영구적으로 보관하고 묵주기도 신심의 중심지가 될 더 큰 성지를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이탈리아 전역의 후원자들에게 기부금을 요청하고, 성모 마리아 성화와 관련된 기적적인 사건에 감사 기부금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대성당의 초석은 1876년 5월 8일에 놓였으며, 이 날은 나중에 폼페이의 성모 축일로 기념되었습니다. 

 

수년에 걸쳐 대성당은 형태를 갖추었고, 마침내 폼페이에 묵주기도의 모후를 기념하는 성전(Shrine of the Virgin of the Rosary of Pompeii) 은 15년 간의 힘든 작업 끝에 1891년 5월 8일에 완공되어 봉헌되었습니다. 성전 봉헌식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수천 명의 순례자, 성직자, 고위 인사가 참석한 웅장한 행사였습니다. 교황은 유례없는 대사와 특은을 이 성전을 찾는 이들에게 허락했으며, 아기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성 도미니코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에게 묵주를 내려주시는 모습이 담겨있는 성화는 황금 액자에 감싸여 중앙 제대 위에 자리했습니다. 이 성전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소성당에는 복자 바르톨로 롱고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는 1926년 10월 5일, 85세의 나이로 선종하였고, 하느님의 어머니와 묵주기도를 사랑하는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10월 21일 폼페이 성지를 순례하였고, 그 이듬해인 1980년 10월 26일에는 바르톨로 롱고에게 복자(축일 10월 5일)의 영예를 안기면서 “묵주기도의 참된 사도” “성모 마리아의 성인”으로 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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