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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해외 성지순례 : 이탈리아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

by 루시아1004 2024.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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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
안토니오 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

 

성 안토니오 대성당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의 삶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은 서로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풍요롭게 합니다. 건축학적 화려함과 풍부한 예술적 유산을 지닌 대성당은 안토니오 성인의 삶과 기적에 대한 기념비적인 증거로 서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등대 역할을 하며 순례자들이 성 안토니오의 심오한 영적 유산을 묵상하도록 유도합니다.

안토니오의 성인의 생애

성 안토니아는 1195년 성모승천 대축일 포르투갈 리스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교회 관습에 따라 아기는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성당에서 성대한 예식으로 세례성사를 받았고 아기는 영세명으로 페르난도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페르난도의 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성당에 가서 "이 어린것을 당신의 아들로 삼으시고 잘 보호하여 주세요."라고 성모상 앞에 꿇어앉아 기도하였습니다. 페르난도가 다섯 살이 된 어느 날, 아이는 제대 앞에 꿇어앉아 평생 동정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들은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고 아들의 뜻을 꺾지 않도록 조심하였습니다. 페르난도는 집이나 성당 감실 앞이나 성모상 앞에서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였습니다. 페르난도가 10세가 되자 부모님은 주교 참사관으로 있는 친척에게 페르난도를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13세기에는 수도원이나 교회의 부속학교에서 배움을 익히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리스본 교구의 부속학교에 들어가서 신부님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페르난도는 날마다 바치는 성무일도 등의 기도를 하면서 거룩한 마음과 몸가짐을 익혀 나가고 아침저녁으로 하느님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성모마리아와 성인들의 이야기를 온 마음을 다하여 듣곤 하였습니다. 

 

1210년 5월 어느 날 페르난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포라의 성 빈첸시오 수도원으로 입회하였습니다. 이 수도원은 포르투갈의 국왕 알퐁스 1세가 러시아에 빼앗겼던 포라를 되찾은 것에 감사하면서 조국의 독립 기념으로 건립한 것으로 그 무렵 덕행과 선과 과학지식의 샘터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었습니다. 페르난도의 바람이 곧 받아들여져서 새하얀 수도복과 흰띠를 받게 되었을 때 기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1212년 자신을 찾아오는 가족 등을 피하려고 코임브라에 있는 성 십자가 수도원으로 옮겨 더욱 적극적으로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8년 동안 공부와 기도생활에 전념하여 1219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는 순교자가 되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혔습니다.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 선교사가 1220년 1월 16일 모로코에서 순교한 것을 보고 코임브라의 작은 형제회로 옮겨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곧바로 아프리카 선교사를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모로코에 도착하자마자 병으로 인해 되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이후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서 설교하라는 명을 받고 설교가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뛰어난 언변과 설교로 사람들은 그를 "이단자를 부수는 망치"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성인에 대한 많은 기적으로 인해 "살아있는 계약의 궤"라고도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소년시절의 기적과 환시

포르투갈에서는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는 기적이야기가 있습니다. 페르난도가 다호 강 근처 자기 집 별장에 있을 때였습니다. 농사짓는 하인들이 가을의 수확을 위하여 봄에 열심히 씨앗을 뿌리고 있었고 아버지는 페르난도에게 참새 떼들이 씨앗을 쪼아 먹으니 쫓아버리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자 페르난도는 성당으로 가서 감실 안의 예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제가 예수님 곁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밭에 나가 새떼를 쫓으라고 하시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예수님께서 무엇이든 다 하실 수가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러니 천사들을 시켜 도와주세요." 이 순진한 어린이의 기도는 이루어졌습니다. 페르난도가 밖으로 나가 흙을 파헤치고 있는 참새들을 불러 모으자 새들은 짹짹거리면서 몰려왔습니다. 아이는 별장의 방 창문을 열고 "하느님께서 너희들을 이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하려무나"라고 하자 참새들은 한 마리도 빠짐없이 그 창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자기 아들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신 하느님의 크신 능력 앞에서 감격하여 울었습니다. 

 

페르난도가 소년기를 접어들던 무렵,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하여 날마다 노력을 기울이는 페르난도의 모습을 보자 마귀는 샘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귀들은 이 젊은 페르난도가 그리스도 복음의 사도, 하느님의 용맹한 장수가 될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페르난도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언제나처럼 성당의 감실 앞에 꿇어앉아 기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치더니 짙은 안개가 천정으로 맴돌면서 온 성당 안을 꽉 메웠습니다. 그러더니 무서운 외마디 소리와 함께 온 사방이 캄캄해져, 페르난도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도 굳센 믿음으로 예수님과 성모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끝까지 의탁할 수 있도록 수호천사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리석으로 된 제단의 층층대에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슬기와 믿음은 마귀들에게 패배감을 주어 달아나게 만든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고 마귀는 요란한 바람소리를 내면서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 십자가 자국은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 대성당 한 구석에서 성지 순례객들에게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되새겨주고 있습니다. 

성 안토니오의 믿음과 소명


12세기 중엽의 교회는 심한 타격을 받고 있었는데 터키 제국은 가는 곳마다 승전을 거듭하면서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들 사이에 여러 가지 분열과 이단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세상 어디서나 불화와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특히 이교도가 살고 있는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어둠의 세계에서 웅크리고 있는 영혼들에게 사랑의 불꽃을 심어주는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때마침 이탈리아 아씨시라는 마을에 새로운 수도회가 생겼는데  그 수도회의 한 가난한 수도자가 포대같이 생긴 겉옷을 걸치고 밧줄로 띠를 삼고 머리를 깎은 맨발의 순례자로서 돈과 먹을 것도 없이 하늘의 새처럼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긴 채 굶어 가면서 이 지방을 지나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코임브라의 한 언덕에 아주 초라한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세워졌으며 몇 사람의 가난한 수사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안토니오 성인이 머물고 있는 성 십자가 수도원에도 찾아와서 음식을 얻어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로코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죽임을 당한 5명의 프란치스코회의 거룩한 순교자들의 유해를 알퐁소 2세 임금의 아우인 돈 페르로가 인계를 받아 코임브라에 도착하여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시켰습니다. 이것을 보고 난 성인은 자기도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어 먼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명예로운 순교를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유해 앞에서 "이분들의 뒤를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편안한 생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서 쓰셨던 가시관을 함께 나누어, 인류구원에 도움이 되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큰소리로 기도하였습니다.  결국 25세가 되어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수도복을 바꾸어 입은 것처럼 이름도 바꾸어 부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에게 붙여지는 페르난도라는 이름을 버리고 은수자들의 아버지인 안토니오라고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성 안토니오 대성당 건축배경

"일 산토(Il Santo)"라고도 알려진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은 종교적 열정, 사회적 요구, 성 안토니오의 삶과 기적으로 인해 1232년 건축이 시작되었고, 14개의 소성당을 가지고 있을 만큼 크고 화려합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1231년 6월 13일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안토니아가 선종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성인으로 신속한 시성 절차를 완료하였는데, 이러한 신속한 시성식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후 1263년에 안토니오 성인이 묻힌 자리에 성당이 세워졌는데, 기공식에서 성인의 유해 이장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당시 프란치스코회 총장인 성 보나벤투라였습니다. 이때 유해가 일반에 공개되었는데, 시신은 이미 많이 부패된 상태였으나, 그의 혀만은 썩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여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어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1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볼로냐의 귀도 추기경이 유해를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여전히 썩지 않고 있어, 혀는 따로 꺼내어 성유물 상자에 보관되었고, 지금까지 계속 일반에 공개되고 있습니다. 또한 대성당에는 안토니오 성인의 성대와 혀, 아래턱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와 관련된 다양한 기적의 증표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의 명성은 포르투갈에까지 널리 퍼졌으며, 오늘날 파도바를 비롯하여 포르투갈의 여러 지역에서는 성 안토니오를 수호성인으로 지정하여 공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오 성인은 잃어버린 살람이나 물건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대성당 안에는 사랑하는 이들을 찾게 해 달라는 사진들이 걸려있고, 실제로 기도를 통해 행방불명되었던 이들을 찾은 사례들이 있어 많은 순례자들이 성 안토니오 대성당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성 안토니오 대성당은 순례의 주요 중심지로서 파도바의 위상을 강화했고, 이는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으며 도시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순례자와 방문객의 유입은 파도바의 문화적, 지적 활력에 기여했으며 종교적 헌신과 학문적 추구가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대성당은 유럽 전역의 학자, 예술가, 독실한 개인을 끌어들이면서 도시의 정신적, 문화적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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