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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해외 성지순례 : 이탈리아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 수녀

by 루시아1004 2024.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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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카타리나의 유해가 있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성 카타리나의 유해가 있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성 카타리나 수녀의 영적 소명

1347년 3월 25일에 이탈리아 시에나의 중산층 대가족에서 태어난 성 카타리나는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비주의자이자 성인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영적 은사와 심오한 종교적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여섯 살 때 그녀는 첫 번째 신비로운 환시를 경험했는데, 어느 날 오빠와 함께 언니의 집을 방문하러 가던 길에 그녀는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갑자기 성 도미니코 성당의 지붕 위로 그리스도께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와 요한과 함께 빛나는 옥좌에 앉아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카타리나를 부드러운 사랑의 눈길로 내려다 보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성호를 세 번 그으면서 강복을 주셨습니다. 이 순간부터 카타리나는 하느님의 임재와 사랑으로 동정의 서원을 하고, 평생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카타리나의 큰 언니인 보나벤투라가 사망하였는데, 언니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부모는 그녀를 형부와 결혼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혼인을 거부하고 무언의 시위로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또한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는 어머니의 뜻에 저항했으며,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외모를 가꾸라는 어머니의 간섭에 항의하여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극심한 단식과 고행을 거친 후 결국 가타리나의 아버지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카타리나는 집에 머물면서 참회와 기도의 삶을 살 수 있는 성 도미니코 제3수도회에 합류했습니다. 그녀는 그 후 3년 동안 거의 완전한 은둔 생활을 하며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그리스도와의 수많은 신비한 만남을 경험했으며, 이를 통해 그녀의 영적 생활이 깊어지고 세상에서 더욱 활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습니다.

성 카타리나의 신앙과 영적 체험

카타리나의 삶에서 가장 잘 알려진 신비로운 경험 중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결혼"입니다. 이 사건은 1368년 그녀가 21세에 일어났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녀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깊은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 수많은 천사에게 둘러싸인 성모님이 성 요한, 그리고 성 바오로와 성 도미니코와 함께 가타리나 앞에 나타나셨으며, 다윗 왕이 하프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성모님은 카타리나의 손을 잡아서 그리스도의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는 카타리나의 손가락에 금으로 된 반지를 끼워주며 “나에 대한 사랑으로 나만을 찬미하기 위하여 너는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과 욕망을 억제했으므로, 너의 창조주이며 구원자인 내가 너와 나 사이에 약혼을 맺는다. 나는 네게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선물하겠노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신앙의 갑옷으로 보호를 받을 것이고, 모든 적들을 이겨내리라.” 하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항상 존재하는 이 반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완전한 봉헌을 상징하고 순결과 봉사의 삶에 대한 그녀의 헌신을 강화했습니다.

이 신비로운 결혼은 그녀에게 목적의식과 신성한 사명을 제공하는 영적 여정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카타리나와 관련된 가장 놀라운 기적 중 하나는 성흔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녀의 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처와 일치하는 상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기적적인 사건은 1375년 그녀가 피사의 성녀 카타리나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 일어났습니다.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도미니코 수도복을 입은 카타리나는 두 팔을 벌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으로부터 오상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그분을 바라볼 때, 극심한 고통과 함께 예수님의 5곳의 상처에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고, 그 빛이 그녀의 손과 가슴, 발에 각각 5개의 성흔을 남겼습니다. 거룩한 빛에 그녀는 몸을 혼자 가눌 수 없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두 명의 천사는 그녀를 지탱해 주었습니다. 그녀 아래 작은 아기 천사는 순결함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있었는데, 왼쪽에 서 있는 천사는 손에 가시관을 들고 있었고, 그 가시관은 그리스도의 삶을 온전히 따르는 성녀 카타리나를 의미합니다. 성녀가 오상을 받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나는 네게 지식과 지혜의 은사를 줄 것이니, 여러 나라를 다니며 위정자와 지도자들에게 내 소망을 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카타리나는 당시 치열했던 교회의 분열을 종식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다른 성흔과는 달리 그녀의 오상은 평생 동안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큰 육체적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오상은 그녀가 죽은 후에야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성 카타리나 수녀가 개인과 교회에 끼친 영향

카타리나의 신앙의 핵심은 평신도부터 교회 지도자까지 모든 사람에게 덕과 회개의 삶을 추구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카타리나 자신의 금욕주의, 기도, 봉사의 삶은 그녀가 설교한 거룩함의 강력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교회의 진정한 개혁은 신자들의 개인적인 성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와 참회를 통해 하느님과 더 깊은 관계를 추구하도록 끊임없이 권고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결혼, 심오한 신학 저술, 기적적인 치유 능력을 통해 카타리나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헌신한 삶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또한 카타리나의 신앙은 개인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녀는 이탈리아 도시 국가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평화를 옹호했으며 불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신앙이 삶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은 공동선을 위해 일할 의무가 있다는 믿음이 그녀가 공무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앙과 행동에 대한 카타리나의 총체적인 접근 방식은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려는 깊이 있는 영성의 변혁적인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카타리나는 아비뇽 교황권과 내부 부패로 얼룩진 교회 역사상 격동의 시기에 살았습니다. 그녀는 로마 교황권의 복귀를 열정적으로 옹호했으며 교회 내의 일치와 개혁을 촉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와 나중에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보낸 편지에는 교회 쇄신에 대한 그녀의 확고한 헌신과 강력하고 고결한 지도력의 필요성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카타리나의 노력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교회 내의 분열을 막는데 중요한 행동이었습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사망한 지 100년도 채 되지 않은 1461년에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시성 되었으며, 이는 그녀가 교회에 끼친 중대한 영향을 반영합니다. 1970년에 그녀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되었습니다. 이 칭호는 가톨릭 신학에 특히 중요한 저술과 가르침을 쓴 성인들에게 부여되는 칭호입니다. 이러한 인정은 그녀가 자신의 삶과 저술을 통해 이룩한 심오한 신학적, 영적 공헌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카타리나는 유럽과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며, 가톨릭 전통 내에서 그녀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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