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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해외 성지순례 : 이탈리아 사도 안드레아와 성 안드레아 대성당

by 루시아1004 2024.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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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아말피의 성 안드레아 대성당
이탈리아 아말피의 성 안드레아 대성당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안드레아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사도들 사이에서 "첫 번째 부르심을 받은 자"로 존경받는 안드레아의 삶과 선교 여행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신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탈리아 아말피의 중심부에는 이 존경받는 성인의 지속적인 유산을 입증하는 장엄한 성 안드레아 대성당(Cattedrale di Sant'Andrea)이 서 있습니다. 놀라운 건축물과 풍부한 역사를 지닌 이 대성당은 계속해서 전 세계의 순례자와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사도 안드레아의 생애

안드레아는 요르단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갈릴레아 호수의 북쪽 연안에 있는 벳사이다라는 지방에서 요한의 아들로 태어나 형 시몬 베드로와 함께 어부로 살았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안드레아는 본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며,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이시다”라고 했고, 안드레아는 그 말을 듣고 즉시 몸을 돌려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와서 보아라”하신 예수님의 초대에 응해 그분과 함께 지낸 후 집으로 돌아온 안드레아는 즉시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하며 그를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두 형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사람을 낚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열두 제자 중 가장 먼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제자이자 주님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안드레아는 최후의 만찬, 부활과 승천 때에도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였습니다. 성령 강림 이후, 안드레아는 다른 사도들과 같이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천사의 도움으로 탈옥하여, 이튿날 아침에 곧장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다시 복음을 전파하다가 다시 제사장들에게 붙잡혀 법정에 끌려나가 심하게 매질을 당한 뒤 풀려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흑해 서부 스키티아 지방과 그리스 지방에서 활발히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많은 기적을 행하고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오늘날의 튀르키예와 그리스, 불가리아 지방까지 가서 선교했다고 합니다. 이 지역들은 오늘날 그리스 정교회가 널리 전파된 지역으로, 안드레아는 그리스 정교회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사도 안드레아의  십자가 설교

초기 기독교 성인전과 2~3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경, 특히 안드레아 행전에는, 안드레아의 선교 활동, 기적, 순교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는 파트라스에서의 그의 체포, 재판, 십자가 처형을 묘사하고 있으며,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설교에 대한 그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과 헌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초기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에서 안드레아와 다른 사도들의 순교를 언급하며 안드레아 행전에 나오는 몇 가지 세부 사항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안드레아의 마지막 설교는 믿음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임박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사명에 열중하며 고통 속에서도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 기꺼이 죽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하여 전파한 이 행위는 역사상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지키도록 용기를 주었습니다. 또한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형과 십자가 위에서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용서와 구원의 말씀을 하신 것처럼, 안드레아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 유사점은 영생에 이르는 길로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본받는 기독교 신앙을 강조합니다. 안드레아는 군중에게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류가 하느님과 화해하고 영생을 약속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안드레아의 설교는 스승이신 예수님의 설교의 핵심 주제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강조했으며,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함으로써 이 신성한 왕국을 준비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사도 안드레아의 순교

70년경 로마 황제 네로의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박해로 인해 사도 안드레아는 로마 제국의 속주 국가인 마케도니아의 아카이아(오늘날 그리스)의 파트라스에서 체포되어 야게오 총독에게 심문을 받고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현재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로 알려진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그는 스승이신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자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 십자가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형장에 끌려갔을 당시 안드레아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쳐들면서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의 곁으로 가게 해 다오” 하며 기쁨에 넘치는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십자가에 매달린 이틀 동안 안드레아는 계속해서 군중들을 향해 설교를 하였으며, 이를 보다 못한 군중이 안드레아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한 집행관에게 안드레아를 십자가에서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집정관이 그들의 요청에 따라 군사들에게 시켜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였고,  안드레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자 갑자기 하늘에서 한 줄기의 빛이 내려와 그를 비추었습니다. 빛은 한동안 그를 감쌌으며 하늘로 다시 올라간 순간 안드레아는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의 순교는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 의해 추모되고 있으며, 스코틀랜드, 러시아, 그리스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832년 스코틀랜드의 왕 앵거스 2세는 군인 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잉글랜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안드레아 성인에게 “승리하면 수호성인으로 모시겠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늘에 X자 모양의 구름이 떴고, 스코틀랜드 군대는 승리했습니다. 그 후 스코틀랜드 인들은 파란색 바탕에 안드레아의 상징인 흰색 X자 십자가를 새긴 깃발을 사용했고, 훗날 이를 공식 국기로 확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도 안드레아의 유해와 성 안드레아 성당

사도 안드레아가 순교한 후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묻었습니다. 그의 매장지는 순례지가 되었고, 사도를 존경하고 그의 중보를 구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안드레아의 유해는 다양한 장소로 옮겨지고 배분되어 그의 대한 숭배가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안드레아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로 옮기라고 명령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중요한 종교 유적지인 거룩한 사도 교회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이의 유해 중 일부는 4세기에 성 레굴루스(통치)에 의해 스코틀랜드로 옮겨졌습니다. 이 유해들은 중세 스코틀랜드의 순례와 종교 교육의 중요한 중심지가 된 현재의 세인트 앤드루스(St. Andrews) 유적지에 안치되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그의 X자형 십자가는 스코틀랜드 국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성 안드레아 대성당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은 십자군 전쟁 중에 사도 안드레아의 유해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아말피로 옮겨진 1208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말피를 중요한 순례지로 나타내고 기독교 세계 내에서 성당의 지위를 높였습니다. 안드레아의 유해를 아말피로 옮기는 것은 침략자로부터 유해를 보호하고 도시의 영적 위신을 강화시키는 전통의 일부였습니다. 이로 인해 사도 안드레아는 아말피 마을의 수호신으로 지정되었고 성당의 이름도 성 안드레아 대성당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15세기에는 그의 두개골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964년 9월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리스 정교회와 화해를 하고 친교를 나누기 위해 그의 유해를 다시 파트라로 보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말피의 성 안드레아 대성당은 9세기에 처음 건립되어 약 천년의 세월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으며, 그의 유해에 부여된 기적적인 힘을 경험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주요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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