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의 사울(바오로)
원래 다소의 사울로 알려진 바오로는 킬리키아의 타르수스(현재의 터키)라는 도시의 유다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벤야민 지파 출신의 유다인이었으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사도 22:3, 22:28).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잘 교육받았고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했으며, 바리사이인의 전통을 열성적으로 고수했습니다(사도 22:3, 필리 3:5-6).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 밑에서 교육을 받은 바오로는 유대 율법에 깊이 헌신한 바리사이인이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기독교인을 열성적으로 박해한 것으로 특징지어졌으며, 그는 기독교인을 유대 전통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습니다. 1세기 중반에도 기독교는 아직 초기 단계였으며, 종종 로마 당국에 의해 오해되고 의혹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포함한 전통적인 로마 종교 관습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을 반역세력으로 취급했습니다. 이러한 긴장은 네로 황제의 통치(서기 54~68년) 동안, 특히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 이후 더욱 높아졌습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의 많은 지역을 황폐화시킨 화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잔혹한 박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으며, 그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했습니다. 회심하기 전에 사울은 기독교인들을 극심하게 박해한 박해자였습니다. 그는 초기 기독교 운동이 유대교에 위협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사울은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인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찬동하였습니다(사도 7:58-8:1).
사도 바오로의 회심
사울은 다마스쿠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승인을 구하게 되었습니다(사도 9:1-2). 사울은 위임장을 손에 들고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150마일 떨어진 다마스쿠스로 떠났습니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 가까워졌을 때, 그의 인생을 영원히 바꿔 놓을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정오쯤에 하늘에서 밝은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어 그가 땅에 졌습니다. 그는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하고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뾰족한 막대기를 차면 너만 아프다”(사도 9:3-5, 22:6-8, 26:13-15)라고 대답했습니다. "뾰족한 막대기를 차면 너만 아프다"라는 문구는 동물을 앞으로 몰기 위해 사용하는 뾰족한 막대기에 저항하는 황소의 일반적인 행동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사울이 하느님의 뜻에 저항했음을 나타냅니다. 사울은 놀라서 “주님,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성으로 들어가면 사울이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도 9:6). 이때 사울과 함께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멍하게 서있기만 했습니다(사도 9:7).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보니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동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가 거기서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사도 9:8-9).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환시 가운데 그에게 말씀하시며 일어나 곧은길이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서 기도하고 있는 다소 사람 사울을 찾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행 9:10-11). 하나니아스는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다는 평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울이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당신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선택하신 그릇이라고 그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사울이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사도 9:12-16). 사울은 하나니아스에게 세례를 받은 후 다마스쿠스에서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전에 기독교인에 대한 적대감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놀라웠습니다. 사울의 담대함과 능력 있는 설교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하였고,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입증하는 일에 점점 더 힘을 얻었습니다(사도 9:19-22).
사도 바오로의 개종 후 초기 사역과 도전
바오로는 회심한 후 제자들과 함께 다마스쿠스에 며칠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하여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전에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한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사도 9:19-21). 그의 강력한 설교는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다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효과적으로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의 담대한 선포는 곧 반대를 불러일으켜 다마스쿠스의 유다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공모하였습니다. 그들의 음모가 바오로에게도 알려져, 제자들은 밤에 그를 데려다가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 난 구멍을 통해 그를 내리게 하여 그의 피신을 돕게 했습니다(사도 9:23-25).
다마스쿠스에서 탈출한 후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갈라디아서 1:17). 비록 그가 아라비아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이 기간은 바오로가 개종하기 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계시를 받고, 장래의 사역을 준비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믿어집니다. 이 고독과 성찰의 시간은 바오로의 영적 성장과 신학적인 발전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바오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이전에 그가 잔혹하게 박해를 했던 것을 기억한 제자들은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를 진정한 개종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인 바르나바는 바오로를 그의 수하에 두었습니다. 그는 바오로를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그의 회심과 다마스쿠스에서의 담대한 설교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바오로가 그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도록 도왔습니다(사도:26-27).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특히 그리스계 유다인들에게 담대히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강력한 논증과 열렬한 설교는 다시 한번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그의 생명을 노리는 또 다른 음모로 이어졌습니다(행 9:28-29). 그를 보호하기 위해 형제들은 바오로를 카이사이아로 보낸 다음 그의 고향인 타르수스로 다시 보냈습니다(사도 9:30). 바오로는 타르수스에서 여러 해를 보냈으며, 그 기간 동안에도 천막 만드는 일을 계속하면서 봉사의 직무도 수행했을 것입니다. 이 기간은 때때로 바오로의 "침묵의 시기"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활동에 대한 세부 사항이 신약성경에 광범위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복음에 대한 이해와 주변 지역에서 선교 활동에 참여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바오로의 잠재력과 안티오키아에서 성장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인식한 바르나바는 바오로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타르수스로 갔습니다. 그들은 함께 안티오키아로 돌아와 그곳에서 1년 동안 교회신자들을 만나 가르치고 굳건하게 했습니다(사도 11:25-26). 안티오키아에서 처음으로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이자 바오로의 선교 여행의 기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