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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해외 성지순례 : 로마 성 밖 바오로 대성당

by 루시아1004 2024.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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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의 신학적 기여

바오로의 전도 여행은 단지 지리적인 탐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 교리를 심오하게 형성한 신학적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로마서와 갈라티아서에 명시된 믿음에 의한 의로운 교리입니다. 이 원칙은 구원이 율법을 준수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총의 선물임을 주장합니다. 바오로는 이방인들이 유대 관습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지 않고도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포함시킬 것을 열정적으로 옹호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그리스도교의 보편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바오로의 신학적 통찰력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과 실천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의 편지는 주요 교리적 논쟁을 다루고 해결하여 정통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제공했습니다. 바오로는 교회를 설립하고 지도자를 임명함으로써 기독교 가르침이 보존되고 전파되도록 했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의 연합에 대한 그의 강조는 더욱 포용적이고 다양한 기독교 공동체를 촉진했습니다. 

바오로의 전도 여행은 또한 초대 교회의 조직적, 구조적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주요 도시 중심지에 교회를 개척하려는 그의 전략은 서로를 지원하고 지탱할 수 있는 기독교 공동체 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바오로의 편지는 주의 만찬 기념, 영적 은사의 사용, 공동 기도 및 찬송을 포함하여 초기 기독교 예배 관행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그의 지시는 예배 관행을 표준화하고 공식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초기 교회 내의 갈등을 다루고 해결하는 바오로의 능력은 연합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분파주의, 도덕적 타락, 교리적 논쟁 등의 문제를 다루면서 목회적 돌봄과 교회의 권징에 대한 모델을 제공했습니다. 바오로의 선교 여행은 더 넓은 그리스-로마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독교 메시지를 다양한 문화적 상황에 적응시키는 그의 능력은 복음이 전파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아테네 아레오파고스에서의 그의 연설은 그가 그리스 철학과 종교에 어떻게 참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며, 청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복음을 제시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순교여정

AD 64년 7월 19일에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네로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4년(64~68년경) 동안 모진 박해를 했습니다. 서기 57년경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자신이 유대 율법에 반대되는 가르침을 주고 이방인들을 성전으로 끌어들여 성전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유다인 지도자들의 비난을 받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예루살렘에서 재판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에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바오로는 카이사리아에서 장기간 투옥된 후 AD 60년경에 로마로 보내졌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죽음의 정확한 상황은 신약성서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초기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바오로는 네로 황제 통치 중에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성 안을 신성시하였기에 성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는데 , 이는 일반적으로 로마 시민에게만 적용되는 처형 방식으로, 비시민권자가 십자가에 처형된 것과 비교하면 다소 "고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바오로의 목이 참수되었을 때 떨어진 목이 세 번 튀었고, 그 튀어 오른 자리마다 샘이 터졌기 때문에 그곳에는 뜨레 포타네 (Tre Pontana) 세 분수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제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 22~24)라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서 원로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며 떠나는 마지막 말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열정을 다해 복음을 전파한 바오로가 자신의 신념을 위해 기꺼이 고통받고 죽으려는 그의 의지는 다음 세대의 기독교인들이 박해에 맞서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또한 아시아 복음화라는 소명을 가진 한국교회에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는 결국 목숨을 바친 순교로서 ‘그리스도의 삶’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 밖 바오로 대성당 설립 배경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은 이탈리아어로 "Basilica Papale di San Paolo fuori le Mura"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의 4대 교황 대성당 중 하나이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교 유적지 중 하나입니다. 풍부한 역사, 건축학적 웅장함, 영적 중요성으로 인해 이곳은 기독교 예술과 건축 연구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 확산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대성당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성 바오로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작은 교회를 지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장소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서 약 2마일 떨어진 비아 오스티엔시스(Via Ostiensis)를 따라 있었기 때문에 "성벽 바깥"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서기 324년에 완성된 원래의 대성당은 규모가 작았습니다. 그러나 순례자 수가 늘어나면서 곧 부족하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서기 386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는 더 큰 대성당 건설을 시작했고, 이 대성당은 서기 395년 호노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완성되었으며, 훨씬 더 웅장하여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대성당은 중세 시대에 걸쳐 수많은 복구과정을 거쳤으며, 8세기에 이르러 이곳은 인기 있는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1070년에 베네딕토회 수사들은 대성당의 관리를 맡게 되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성당의 종교 및 건축 유산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대성당은 성 바오로의 무덤이 있던 전통적인 장소 위에 지어졌으며 순례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9세기에 대성당 복구공사를 진행하기에 앞서 실시한 발굴 작업을 통해 1,2 세기 무렵의 무덤이 발견되어 고고학자들이 성당 지하를 다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390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대리석 관이 나왔으며, 석관에는 "사도 바오로 순교자"라고 적혀 있어 성 바오로의 유해를 모신 관으로 추정됐습니다. 석관에는 세 개의 구멍이 있는데 고고학자들은 구멍으로 물체를 집어넣어 성 바오로의 유해와 접촉하게 함으로써 제2의 유해를 만들기 위해 뚫은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1~12절에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라고 하였 듯이 성 바오로의 유해도 그러한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 발견은 신성한 장소이자 숭배의 장소로서 대성당의 중요성을 재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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