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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지순례 : 로마 산타 스칼라(성 계단 성당)

by 루시아1004 2024.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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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산타 스칼라(성 계단 성당)
로마 산타 스칼라(성 계단 성당)

 
산타 스칼라로 알려진 성 계단 성당은 로마의 가장 중요한 종교 기념물 중 하나로 깊은 역사적, 정신적, 문화적 뿌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존경받는 장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심오한 영적 중요성과의 연관성에 이끌려 매년 수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예수님이 빌라도 총독의 심문을 받기 위해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야 했던 ‘성스러운 계단’ 이 있으며 로마에서 예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예수님의 재판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체포되어 대제사장인 카야파에게 밤새 심문을 받고, 유다사회의 최고 권력기관인 산헤드린에서 공식적인 재판을 받으면서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사형권리가 없었고, 로마 총독에게 사형권이 있었기 때문에 대사제들과 유다 원로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그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넘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군병들에게 시달림을 받으셨던 터라 지치고 무거운 몸을 끌고 빌라도 총독 관저의 돌계단을 올라가시면서 쓰러지셨고, 다시 일어나서 올라가시어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대사제들과 군중을 향하여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찾아낼 수 없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갈릴래아 사람이란 것을 알고 당시 갈릴래아를 통치하고 있었던 헤로데왕에게 보냈는데, 마침 유월절을 맞이해서 헤로데가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자기 경비병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며 모욕을 준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다시 빌라도에게 떠 넘깁니다(루카 23:5 ~10).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 법정으로 돌아와 채찍에 맞으셨는데, 살점이 터지고 뜯겨 피가 흐르는 채 주님은 그 계단에서 끌려 내려와 십자가를 지고 해골산으로 가시어 십자가형에 처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서 53장 5절에는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타 스칼라성당의 성 계단 

산타 스칼라 성당 정문을 들어서면 위층 소성당으로 올라가는 곳에 28단의 계단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성계단(Scala Santa)으로,  예수님 수난 후 약 300년 동안 예루살렘 땅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 로마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박해를 끝내고 기독교를 공인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인 성 헬레나의 노력에 힘입어 기독교 유물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습니다. 성 헬레나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그녀는 서기 326년경 성지 순례를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과 관련된 유물을 발견하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순례 기간 동안 성 헬레나는 수많은 유물을 발견하고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그중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본시오 빌라도 총독관의 일부로 여겨지는 28단의 대리석 계단이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심판을 받으러 올라가셨던 바로 그 계단이었습니다. 심오한 영적 의미가 담긴 이 계단은 당시 교황 실베스테르(Silvestro, 314-335) 1세에게 기증하였고, 옛 교황청이었던 라테라노(Laterano) 궁에 설치하여 보관하였습니다.
 
성스러운 계단이 있는 라테라노 궁전은 14세기까지 교황의 주요 거주지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방치된 라테라노 궁의 남은 일부를 1589년 교황 시스토 5세가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면서 유명한 건축가 도미니코 폰타나에 의해서 지금의 성당에 성 계단을 설치하게 됩니다. 이후 일반 순례자들에게 개방을 하여 현재까지 모든 순례자들은 무릎을 꿇고 오르면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순례자들이 무릎을 꿇고 올라오면서 당시 28단의 대리석 계단이 많이 훼손되어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1723년 인노첸시오 13세 교황님께서는 계단을 마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 계단 위를 호두나무 덮개를 씌웠습니다. 1853년 교황 비오 9세는 이곳의 관리를 그리스도 수난회의 수도사들에게 맡겼으며, 또 한 번 계단 28단과 천장, 벽의 프레스코화 등 10년에 걸쳐 복원작업이 완성되었습니다. 복원된 성계단은 덧신을 신은 채 무릎과 손으로만 오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순례자들이 성 계단을 무릎과 손으로  올라가면서 온갖 수모를 겪었던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성 계단과 관련된 기적

전통에 따르면 성 계단의 기적에는 불구가 되어 걸을 수 없는 어린 소년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의 가족은 기적적인 치유를 바라며 그를 산타 스칼라로 데려왔습니다. 소년이 계단으로 올라가는 동안 그의 가족은 간절히 기도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했습니다. 마침내 계단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소년은 일어나 스스로 걸었고, 병이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기적적인 사건을 수많은 순례자들과 성직자들이 목격했고 그들은 갑작스럽고 완전한 치유에 놀랐습니다. 성 계단의 기적은 중세 연대기와 종교 문헌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적은 성인들의 중보와 기도의 효능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켰습니다. 소년의 치유 이야기는 빠르게 퍼져나갔고, 신성한 계단으로 더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들었고, 스스로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그들 자신의 기적을 추구하고 싶어 했습니다. 성직자와 순례자들은 소년이 이전에 걸을 수 없었다가 갑자기 회복된 사실을 강조하면서 기적의 진정성을 모두 입증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다양한 교회 문서에 기록되어 산타 스칼라가 기적적인 사건의 장소라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천사들이 그렸다고 알려진 아케로피타(예수님 얼굴 이콘)

거룩한 지성소 산크타 산크토룸(Sancta Sanctorum)

성 계단을 오르면 바로 산크타 산크토룸 즉, 거룩한 성소, 또는 지성소라는 교황님 전용 기도실이 있습니다. 콘스탄스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다음에 바로 313년부터 로마 교구 내 최초의 성당인 라테라노 대성당을 짓게 되는데  그때 이 기도실을 같이 짓게 되어, 마침내 실베스트로 교황 314년에 완성됩니다. 이곳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등 많은 성물들이 있었고, 교황만이 들어가 기도하곤 했습니다. 또한 왕은 국가의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이 거룩한 성소에 와서 기도를 드렸고, 많은 교황들이 사순시기에 이곳에서 기도와 미사를 드려 더 유명해졌습니다. 위에는 "이 땅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다. 이보다 거룩한 곳은 없다"라고 적혀 있어 지성소는 하느님이 계시는 곳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밑에는 천사들이 그렸다고 알려진 "아케로 피타" 즉 예수님의 이콘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730년에 천사가 그린 그림이라고 알져진 아케로 피타를(예수님의 얼굴 이콘) 보관하였는데, 756년 스테파노 2세 교황은 롬바르도족이 침략하여 로마에 위기가 닥쳐오자 맨발로 예수님의 이콘을 등에 메고 로마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울면서 로마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해 롬바르도족 왕이 전쟁 중에 말에서 떨어져 죽음으로써 승리하게 되어 이후 신성로마제국을 이룩하여 중세 교황권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산타 스칼라성당의 유래

성 계단 성당의 기원은 초기 기독교 시대, 특히 서기 4세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성 헬레나의 노력에 힘입어 기독교 유물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습니다. 성 헬레나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그녀는 서기 326년경 성지 순례를 떠났고, 순례 기간 동안 그녀는 수많은 유물을 발견하고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그중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본디오 빌라도의 총독관의 일부로 여겨지는 28단의 대리석 계단이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심판을 받으러 올라가셨던 바로 그 계단이었습니다. 심오한 영적 의미가 담긴 이 계단은 로마로 옮겨져 처음에는 교황의 공식 거주지인 라테라노 궁전에 보관되었습니다. 성스러운 계단이 있는 라테라노 궁전은 14세기까지 교황의 주요 거주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계단의 명성이 높아졌고 계단을 수용할 수 있는 보다 형식적이고 접근 가능한 구조에 대한 필요성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증가하는 순례자 수를 수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재건과 확장이 이루어졌습니다. 16세기 후반에 교황 식스토 5세(재위 1585-1590)는 성계단을 모실 수 있는 보다 실질적인 건물의 필요성을 인식했으며 르네상스 건축 양식으로 디자인되어 1589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교황 식스토 5세의 의뢰로 제작된 프레스코화는 체사레 네비아(Cesare Nebbia)와 조반니 게라(Giovanni Guerra)를 비롯한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제작했습니다. 성당의 예술성은 공간을 아름답게 할 뿐만 아니라 방문하는 사람들의 영적 경험을 심화시키는 역할도 합니다. 28개의 대리석 성 계단은 보호용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순례자들이 무릎을 꿇고 올라갈 수 있도록 하면서도 온전함을 유지합니다. 성당은 추가적인 프레스코화와 경건한 물건들로 장식되어 기도와 성찰에 도움이 되는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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